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2018년 파기된 이란 핵 합의(JCPOA)를 대체하고, 이란에 억류된 자국민을 석방시키기 위한 물밑 협상을 이란과 진행 중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4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이번 협상 의제 중에는 우리은행과 IBK기업은행에 묶여 있는 한국의 이란 원유 수입 대금 70억달러(약 9조원)를 해제하는 방안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이 성과를 거둘 경우 미국과 이란의 오랜 적대 관계에 해빙 무드가 조성될 수 있고, 최근 경색됐던 한국과 이란 관계도 개선의 전기를 맞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WSJ에 따르면, 양측은 작년 12월 뉴욕에서 고위 당국자 간 비공개 회담을 한 뒤 지금까지 협상을 진행해 오고 있다. 아랍 국가 중에서 미국, 이란과 모두 관계가 원만한 오만이 이번 협상을 중재하고 있다. 백악관 고위 당국자들이 최소 세 차례 오만을 찾았다. 협상의 큰 틀은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이란에 억류된 이란계 미국인 세 명을 석방하는 대가로 미국이 경제 제재를 완화해 주는 것이다.

그래픽=이진영

바이든 행정부와 이란의 물밑 협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바이든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타결됐다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파기된 이란 핵 합의의 복원을 중동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취임 후 유럽연합 및 카타르의 중재로 이란과 간접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미국과 이란 간 입장 차가 컸던 데다,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긴급 이슈에 밀리면서 2022년 8월 이후 사실상 중단돼 왔다.

이번 협상은 지난번과는 다른 국면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우선 이라크 내 이란 자금의 동결 해제라는 가시적 성과가 나왔다. 이라크 정부 당국자는 지난 10일 자국에 동결돼 있는 대이란 가스·전기 수입 대금 중 27억6000만달러(약 3조5000억원)가 미국의 승인으로 해제됐다고 밝혔다. 이번 동결 해제는 미국 고위 관리가 이란과의 간접 협상차 오만을 찾은 직후에 확정됐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이 돈은 경제난에 허덕이는 이란 정부에 가뭄의 단비가 될 전망이다. 이스라엘 정보 당국도 이번 협상이 상당 부분 성과를 내면서 합의가 임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했다.

이란 핵 합의가 처음 타결되던 때와 국제 정세가 판이하게 달라진 점도 긍정적 요인으로 꼽힌다. 2015년 첫 타결 때 가장 격렬하게 반발했던 나라는 이란과 중동 내 패권을 다투는 사우디아라비아였다. 그러나 두 나라는 최근 중국의 물밑 중재로 전격 국교를 복원했다. 이에 따라 사우디가 과거처럼 반대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다만 합의 참여국인 안보리 상임이사 5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미국·영국·프랑스 대 러시아·중국 구도로 분열되고 있는 점이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5년 이란 핵 합의가 타결됐을 때 이슬람 혁명 후 40년 가까이 단절됐던 미국·이란과의 관계가 본격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았다. 자원 부국 이란과 서방 기술 강국들의 합작 프로젝트 계획에 대한 뉴스가 쏟아졌다. 그러나 합의 탈퇴와 대이란 경제 제재 복원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2018년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란이 이에 반발하며 핵 합의에 명시된 우라늄 농축 한도 등 각종 규정을 노골적으로 어기면서 합의는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됐다.

2015년 타결된 합의문은 전문과 부속 조항 6개로 이뤄진 방대한 분량의 문서다. 그러나 미국은 이번 이란과의 협상에서는 비공식적이고 성문화되지 않은 형태의 합의를 추진하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이란은 주요 핵 시설에서 생산 중인 고농축우라늄(HEU) 농도를 현재의 60% 수준에서 더 올리지 않고, 국제 핵 사찰단의 활동에 협조하며, 혁명수비대나 헤즈볼라 등 친이란 군사 세력을 동원해 중동 주둔 미군이나 미 정부 계약 업자들을 공격하지 않고, 러시아에 대한 무기 수출도 자제한다는 등 대략적 틀에서 구두 중심 합의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사자들이 합의 내용을 좀 더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해 파국 가능성을 낮추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번 미국·이란 물밑 협상의 타결로 국내 은행에 묶인 한국의 대이란 원유 수입 대금 70억달러가 풀릴 수 있을지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과 이란은 2010년 우리은행과 IBK기업은행에 원화 결제 수출입 대금 결제 계좌를 만들었지만, 2018년 미국이 이란 핵 합의를 탈퇴하고 대이란 제재를 복원한 데 따른 여파로 이듬해 동결되면서 이란의 인출이 불가능해졌다. 이 계좌에 묶여있는 이란의 대한국 원유 수출 대금(70억달러)은 이란의 해외 동결 자산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