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은 27일(현지 시각)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州) 선거구를 보수 성향 공화당에 유리하게 획정한 주 의회 결정을 막은 주 법원의 판결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주 의회가 만든 선거구에 주 법원이 간섭할 권한은 없다’는 주 의회 공화당 지도부의 주장을 기각한 것이다. 9명의 대법관 가운데 6명이 기각 의견을 낸 결과다. 6명이 보수, 3명이 진보 성향으로 각각 분류되는데도 이런 판결이 나왔다.
좌우 진영 대립이 한창인 미국 사회의 첨예한 쟁점을 최종적으로 심판하는 미 연방대법원에서 이런 ‘예상 밖 판결’이 자주 나오고 있다. 중심엔 존 로버츠(68) 대법원장이 있다. 2005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명으로 임명된 로버츠 대법원장은 보수 성향이라고 여겨지는 ‘공화당 판사’다. 하지만 진영 논리에 치우치지 않는 판결로 ‘이념 균형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미 대법원은 소수 인종 우대 폐지 등 내년 미 대선과 관련한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칠 굵직한 판결을 여럿 앞두고 있어, 로버츠의 행보는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이번 노스캐롤라이나주 선거구 판결에서 로버츠 대법원장은 진보 성향 3명과 같은 의견을 냈고, 2명의 또 다른 보수 성향 대법관도 동참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주 의회가 어떤 간섭도 없이 선거 제도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이 지난 대선 때 ‘선거 불복’을 외치며 꺼내들었던 논리”라고 전했다. 보수 편향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대법원은 그러나 주 의회가 법원의 어떤 관여조차 없이 마음대로 선거구를 바꿀 수는 없다고 결정했다.
2012년 6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 개혁법(오바마 케어)’에 대한 합헌 판결 당시에도 그는 예상을 깨고, 당시 진보 법관 4명의 편에 섰다. 판결을 앞두고 로버츠 대법원장을 제외한 8명 가운데 진보 성향 4명이 합헌, 보수 성향 4명이 위헌 의견을 각각 보였기 때문에 로버츠 대법원장의 선택에 관심이 집중됐었다. 그는 판결문에서 “모든 미국인들이 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 벌금형에 처해지도록 한 핵심 조항이 헌법 정신에 부합한다”고 했다. 판결 직후 로버츠는 일부 보수층엔 ‘배신자’로 비난받았다.
2020년 불법 이민자 부모를 따라온 미성년 입국자의 추방유예(DACA) 제도를 존속시킨 사건 등에서도 로버츠는 진보 대법관들과 한편에 섰다. NYT는 “로버츠는 법 하나로 제도나 사회를 단숨에 바꾸기보다는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조금씩 보완해 가자는 점진적인 변화를 선호하는 성향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사법부에는 오바마 판사도, 트럼프 판사도, 부시 판사도, 클린턴 판사도 없다.” 로버츠 원장의 2018년 11월 성명은 그의 소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다.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자신의 이민 정책에 제동을 건 연방법원을 ‘(진보 편향의) 오바마 판사들’이라고 비난하자 내놓은 반박 성명이다.
그는 인사 청문회 당시 판사를 ‘야구 심판’에 비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판사는 (야구에서) 볼인지, 스트라이크인지만 판정하는 심판처럼 객관적으로 법을 해석하는 직업”이라며 “법관들이 (감독처럼) 벤치에 앉아 법률을 다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대법원의 정치적 독립성을 중시하는 ‘제도주의자’ 로버츠의 사법적 신중함을 보여주는 유명한 진술”이라고 평가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로버츠 대법원장은 하버드대 역사학과를 3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같은 대학 로스쿨을 나왔다. 레이건 행정부 법무부 장관 특별보좌관 등으로 일했고, 2005년 9월 연방대법원장에 올랐다. 정통 엘리트 법조인 이력의 이면에는 성 소수자나 노숙인 등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20~30대 시절이 있었다. NYT는 “그는 학부 시절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하기 위해 제철소 현장 근로자로 취업했고, 1980년대 변호사로 일할 때는 동성애자·노숙인들을 변호했다”며 “이런 그의 성정이 중도 성향 판결에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부 주장을 맡을 정도로 운동 실력도 빼어나고, 리더십도 갖췄다는 평가다.
하지만 진보 진영 사이에서 로버츠 대법원장의 최근 ‘선택’을 둘러싼 의구심도 일고 있다. 최근 ‘강성 보수’로 분류되는 다른 대법관들이 잇따라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사실이 폭로되며 대법원이 비난받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판결의 강도를 조절하려는 의도라는 지적이 나온다. 로버츠는 이 논란을 해명하라는 상원의 출석 요구를 ‘법원 독립성’을 내세워 거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