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도, 비난하지도 않겠습니다”… 美 ‘영아 피난제’ 광고판 - 영아 피난제(Safe Haven Law)를 홍보하는 미국 인디애나주(州)의 광고판. “수치도, 비난도 없고 이름도 남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다. 영아 피난제는 부모가 키울 자신이 없는 아기를 버리는 대신 24시간 공무원이 상주하는 소방서 등에 데려오면, 부모를 처벌하지 않고 아기의 양육을 국가가 책임지는 제도다. /WTHR(인디애나 지역 방송국)

지난 5일(현지시각) 미국 텍사스주 플라노시(市)의 고속도로 변 한 상점에 당황한 표정의 10대 소년이 들어왔다. 그는 점원에게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 내 여자친구가 1시간 전 막 낳은 아기가 있다. 우린 키울 능력이 없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차 안에는 한 소녀가 신생아를 수건에 싸둔 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점원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911 구조대는 신생아를 인근 병원에 즉시 이송해 건강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플라노 경찰은 아기 부모의 건강도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이들의 신원과 거주지, 아기를 키우지 못하는 이유 등 아무 것도 캐묻지 않은 채 돌려보냈다. 아기는 즉시 텍사스주와 국가의 양육 책임하에 넘겨졌다. 향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정식 입양 절차를 밟게 된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영아 피난제(Safe Haven Law)’ 덕분이다. 영아 피난제는 주(州)에 따라 생후 3~60일 된 아기의 양육을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양육 포기할 수 있는 법이다. 바구니에 버려졌던 이스라엘 선지자 모세에 빗대 ‘아기 모세법’으로도 불린다. 50개 주와 워싱턴 DC 등 전국에서 시행 중이다.

영아 피난제를 설명하며 "아기를 못 키우게 되더라도 겁먹지 말고 지역사회와 국가에 맡기라"는 내용의 미 뉴저지주 홍보물. /뉴저지주

영아 피난제는 부모나 부모의 대리인이 아이를 학대하지 않은 건강한 상태로, 안전한 곳(병원 응급실이나 경찰서·소방서 같이 24시간 운영하는 관공서 등)에 데려다놓거나 핫라인(긴급 콜센터)에 연락하면 아기를 즉시 국가가 보호하되 부모에게 형사 책임은 물론 도덕적 책임도 일체 묻지 않는 식으로 운영된다. 부모를 추적하지도 않는다. ‘아기를 내가 키우지는 못하지만 사회가 잘 키워줬으면 좋겠다’는 선의(善意)만 확인되면 국가가 출산의 익명성을 보장해줄 테니, 아기를 함부로 버리거나 죽이지 말라는 취지다.

이번에 플라노 경찰도 “이 커플은 영아 피난제를 몰라 당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은 아기를 살리려 용감한 선택을 한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아기를 낳은 것은 누구도 비난할 일이 아니다. 부끄러워하지도 말라. 안전하게 아기를 데려오기만 해달라”고 발표함으로써, 태어난 아기의 안전을 위해 ‘키우지 못해도 괜찮다. 아기를 국가에 맡기라’는 취지를 강조했다.

미국은 영아 유기·학대·살해나 출생 미등록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아기가 태어난 병원에서 출생 사실을 등록하고, 정부와 복지사 등이 확인을 거쳐 지방자치단체 시스템에 등록하게 돼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간 게 병원 밖 출생까지도 최대한 보호하겠다는 영아 피난제다. 한국에선 익명 출산을 보장하는 ‘보호출산제’가 국회 논의에서 막혀 있다.

미국에서 국가가 익명 출산을 보장하고 양육 책임을 나라가 맡는 '영아피난제'가 50주에서 실시되고 있지만, 여전히 이어지는 영아 불법 유기를 막기 위해 민간 등에 베이비박스를 더 확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세이프 헤이븐 베이비 박스' 창립자인 모니카 켈시가 지난 2월 켄터키주의 한 소방서에서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에선 1990년대까지도 모든 영아 유기를 중범죄로 다스렸다. 그러자 미혼모 등의 출산과 불법 유기가 급증했다. 1997년 뉴저지주에선 한 여고생이 졸업파티 도중 인근 공중화장실에서 아기를 낳고는 쓰레기봉투에 싸서 버린 뒤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간 사건이 일어나 큰 충격을 줬다. 아기는 숨진 채 발견됐다. 앞서 델라웨어주의 한 대학생이 신생아를 모텔 쓰레기통에 버리고 간 사건도 있었다. 이런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해 언론에 보도되면서 처벌만으로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 나아가 인권을 지킬 수 없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그래픽=이지원

1999년 텍사스주에서 처음 영아 피난제가 발효됐고, 2008년까지 모든 주에 확산됐다. 이 9년간 각 주에선 영아 피난제가 무분별한 혼외 출산이나 부부들의 자녀 유기를 조장할 수 있다는 반론이 일면서 격론이 벌어졌다. 한국 종교·복지단체 등에서 운영하는 베이비 박스(baby box)를 둘러싼 논란과 흡사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이 제도 덕에 구한 생명이 훨씬 많았다는 평가다. 전미 영아 피난제 연맹에 따르면 1999~2021년 22년간 영아 피난제 덕에 전국에서 구출된 아기는 최소 4505명이다. 반면 같은 기간 불법으로 버려진 아기는 1608명이며, 이중 절반이 넘는 900명은 목숨을 잃었다.

지난 2019년 미 인디애나주의 숲속에 비닐봉투에 싸여 버려진 여아. '인디아'로 이름 붙여진 이 아기는 다행히 목숨을 건져 입양돼 자라고 있으며,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비밀리에 아기를 낳아 버린 40세의 생모는 최근 경찰의 4년 수사 끝에 검거됐다. 이렇게 불법으로 버려지는 아기가 미 전역에서 최소 연 수십 명이다. /조지아주 경찰

미국은 한편으로 불법적인 유기·학대에 대해선 끈질기게 책임을 묻고 있다. 2019년 조지아주의 한 숲에 탯줄이 달린 채 버려진 아기가 기적적으로 구조됐는데, 조지아 경찰은 4년간 수사 끝에 지난 5월 생모를 찾아 검거했다. 40세인 생모에 대해선 “영아 피난제에 따라 안전하게 아기를 맡길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며 1급 살인 미수죄가 적용됐다. 이런 일은 매년 전국에서 수십 건씩 여전히 일어난다. 텍사스주에선 영아 피난제 덕에 살아난 여자 아기가 커서 경찰이 된 뒤 베이비 박스를 관공서뿐만 아니라 민간에도 확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