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영화산업 메카인 미국 할리우드가 작가와 배우 양대 노동조합의 동시 파업으로 멈춰섰다. 이들과 제작·배급사들이 갈등을 겪는 핵심 뇌관은 할리우드의 판도를 급속히 바꾸고 있는 인공지능(AI) 기술이어서, ‘AI 파업’이란 말도 나온다. 세계인의 ‘꿈의 공장’을 효율적인 기계와 로봇이 지배하게 할 것이냐, 직업 예술인들의 존엄과 권리를 전통적 방식으로 지켜줄 수 있느냐를 두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설립 90년, 16만여명이 소속된 미 배우·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은 14일(현지시각) 자정을 기해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지난달부터 디즈니·유니버설·넷플릭스 등 영화·TV제작자연맹과 고용계약 협상을 벌여, 연방정부까지 개입해 막판 중재를 시도했지만 협상이 결렬됐다.
지난 5월 할리우드의 또다른 주요 노조인 작가조합(WGA)이 파업을 결정한 뒤 수만명이 LA·뉴욕 등에서 두달째 거리 시위를 벌이고 있어, 이미 TV 프로그램과 영화 제작이 줄스톱 된 상황이다. 작가·배우조합이 동반 파업을 벌이는 것은 메릴린 먼로가 참여하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배우조합장을 지내던 1960년 이후 63년만이다. 연 1340억달러(170조원) 규모 미 영화·TV 시장의 이번 파업 피해는 40억달러(5조원)를 넘을 것이란 추산이다.
LA타임스와 CBS·CNBC 등에 따르면, 이들이 파업까지 가게 된 핵심 문제는 바로 AI 다. AI가 할리우드 장인(匠人)들의 영역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으며, AI 윤리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규제가 확립될 때까지 이번 파업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영국 배우조합도 “AI 때문에 배우들 일자리가 없어진다’”며 파업을 예고했다.
배우와 성우들의 얼굴과 목소리는 딥페이크(deep fake·AI가 서로 다른 영상·이미지를 자연스럽게 합성해주는 기술)로 얼마든지 재창조되고 있다. ‘AI 아바타 저작권’이란 개념도 생겨, 톰 행크스나 톰 크루즈 같은 유명배우는 막대한 저작권을 챙기게 됐다. 그런 톰 행크스조차 “내가 당장 교통사고로 죽어도 계속 연기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며 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실어증으로 은퇴한 ‘다이하드’ 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모르는 상태에서 그의 전성기 모습을 이용한 딥페이크 광고가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번 노사 협상에서 제작자연맹은 ‘연기자들이 하루 일당만 받고 촬영하면 그 이미지를 회사가 소유하고 이후 AI로 작업해 영원히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제안했다고 한다. 배우들은 “디지털 초상권을 보호할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작가 여러명이 달라붙어 수개월~수년씩 걸려 쓰던 TV·영화 대본도 챗GPT 같은 생성형AI로 순식간에 그럴듯하게 만들어진다. 유명 시나리오 작가·감독 빌리 레이는 “쉽게 만든 대본은 쉽게 소비되고 버려질 것이다. 이제 ‘대부’나 ‘오즈의 마법사’ 같은 명작은 못 나올 것”이라고 비판했다.
수많은 영화판 스탭들도 위기다. 80세 노배우 해리슨 포드는 ‘인디애나 존스’에서 AI 디에이징(de-aging) 기술로 40대 모습을 연기할 수 있었다. 이는 과거 숙련된 기술로 희소성을 인정받았던 특수분장이나 시각·음향효과 예술가, 영상편집 전문가 등의 설자리가 좁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또 작가·배우들은 동영상 스트리밍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넷플릭스·애플·유튜브 같은 빅테크 플랫폼 기업의 수익은 급증하지만, 정작 자신들에겐 재상영분배금(residual) 같은 로열티 배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할리우드 톱스타들이 ‘AI파업’ 참여·지지를 선언하면서 세계 팬들도 AI 시대의 각종 논란을 새롭게 받아들일 계기가 될 전망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새 영화 ‘오펜하이머’ 제작·출연진은 13일 배우조합 파업에 연대하기 위해 런던 시사회 시간을 1시간 앞당겼고, LA에서 파업이 시작되자 주연배우 맷 데이먼 등이 시사회장을 떠나기도 했다. 데이먼은 “이번 파업은 죽고사는 문제”라며 “업무 중단도 안 되지만 공정한 협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메릴 스트립, 제니퍼 로런스, 벤 스틸러, 마고 로비 등 유명배우 300여명도 파업 참여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