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죄를 받아야 할 사람이 죗값을 치르게 됐습니다. 얼른 그를 감옥에 집어넣으세요!”

“이건 모두 음모입니다. 내년 대선에서 지지율이 선두를 달리니까 다급해진 정부가 그를 가두려는 것 아닙니까.”

4일(현지 시각) 오후 워싱턴DC 연방법원 청사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과 반대 시위자들이 몰려있는 모습. 트럼프는 이날 오후 3시30분쯤 법원에 출석했다. /이민석 특파원

2020년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투표 인증을 지연시키려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3일(현지 시각) 오후 미국 수도 워싱턴DC 연방법원에 기소인부 절차를 위해 출석했다. 그의 출석을 앞두고 이날 오전부터 DC 법원 앞에 언론사 기자, 유튜버, 트럼프 지지자들과 반대 시위자 등 수백명의 인파가 몰렸다.

2023년 8월 4일(현지 시각) 투표 인증을 지연시키려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법원 출석을 앞두고 워싱턴DC 연방법원 청사 앞에 수백명의 인파가 몰렸다./ 이민석 특파원

◇전날까지 긴장감 고조...막상 당일은 축제 분위기

트럼프에 대한 기소는 이번이 세 번째이지만, 전날까지 긴장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트럼프가 이날 출석한 법원은 지난 2021년 1월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 사건인 ‘1·6 사태’가 벌어진 연방의회에서 직선 거리로 불과 690m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1.6사태로 5명이 숨지고, 840명이 체포됐었다. 1.6 사태를 주도한 용의자들 대부분이 트럼프가 이날 찾은 DC법원에 섰었다. NBC뉴스는 “워싱턴DC 지역 주민들에게 트럼프의 이날 법원 출석은 그들의 뒷마당에서 일어난 끔찍한 폭동을 상기시키는 날”이라고 했다.

4일(현지 시각) 오후 미국 수도 워싱턴DC 연방법원 앞에서 한 트럼프 반대 시위자가 '트럼프의 기소 축하 투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지나가고 있다. /이민석 특파원

그러나 이날 법원 앞은 트럼프가 지난 4월 성추문 혐의로 기소당해 뉴욕 법원을 찾았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당시 뉴욕 법원 앞엔 수만명의 인파가 몰려 트럼프 지지자들과 반대자들간 대치가 벌어졌었지만, 이날 워싱턴DC 법원 앞은 ‘축제’를 연상시켰다. 트럼프 반대 시위자들은 이날 ‘그를 가두자’ ‘드디어 죗값을 받게 됐다’ ‘기소를 축하한다’ 등의 플래카드와 함께 노래를 틀면서 행진했다. 이에 비해 트럼프 지지자들은 비교적으로 열세였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트럼프 재선 기원’ 등의 깃발을 흔들었지만 트럼프 반대 시위자들에 밀리는 분위기였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법원 청사앞은) 시위자들보다 기자들이 더 많았다”며 “트럼프 지지자들이나 반대파 등 소수의 사람들로 붐볐다”라고 했다.

이는 민주당 성향이 강한 ‘블루 스테이트’로 분류되는 워싱턴DC 특성이 반영된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한 의회 관계자는 “1.6사태가 일어난 곳인만큼 미 수사 당국이 소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통행을 최대한 통제했다”며 “법무부, FBI(연방수사국) 등이 1.6사태와 관련 수사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것도 (트럼프 지지자들이) 몰리는 것을 막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3일(현지 시각) 워싱턴DC 연방법원 출석을 앞두고 경계를 위해 배치된 경찰 요원들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로이터

수사 당국은 1.6사태 때와 같은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날 오전부터 주변 교통을 통제하고 거리 곳곳에 요원 및 차량을 배치했다. 트럼프 출석 전날에도 상원 사무실에 총격범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 의회 직원들이 건물 밖으로 피신하는 일이 발생했었다. 의회 경찰 200명이 상원 건물을 수색했으나 총격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날 오후 무장한 워싱턴DC경찰과 국토안보부 및 비밀경호국(SS) 요원, 법원·검찰 방호원, 사복경찰들은 법원 사방에 철제 펜스를 친 채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법원 앞 광장 출입을 통제해 시위대들이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인근 지하철역에도 총기를 휴대한 경찰들이 지하 통로를 오가며 특이 사항을 살폈다.

◇트럼프 반대파들 음악 틀고 춤추면서 ‘조롱’

이날 찬반 시위대끼리 물리적으로 충돌하거나 트럼프 지지자들이 펜스를 넘어 법원 청사에 진입하는 등의 돌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찬반 시위대가 청사 앞에 몰리면서 서로를 향해 고함을 치는 장면이 여러번 나왔다.

50대 여성 돈 피크너(가운데)씨가 4일(현지 시각) 워싱턴DC 연방법원 앞에서 '트럼피즘(트럼프의 극단적 주장에 열광하는 현상)'을 멈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웃고 있다. /이민석 특파원

50대 여성 돈 피크너씨는 기자와 만나 “2021년 1.6사태로 미국의 민주주의의 근본이 무너졌었다”며 “이를 바로잡는 것은 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과 같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트럼프의 각종 거짓말과 사회 소수층에 대한 압박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너무 심하다”며 “이제는 그가 죗값을 치러야 할 때”라고 했다.

반면 이를 듣던 브라이언 딕스씨는 피크너씨 말이 끝나자마자 “웃기는 소리”라며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율이 공화당 내에서 선두를 달리고, 바이든 보다도 인기가 많으니까 기소처리를 한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의 대선 구호인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그는 “기소 타이밍을 보라, 기가 막히다. 의도가 명백하지 않은가”라며 “사법 당국이 트럼프를 가두기 위해 기소라는 무기를 쓰고 있다”고 했다.

이날 소수의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만이 대통령” “그만이 이길 수 있다” “다음 대선은 트럼프” 등의 구호를 외쳤다. 전날 뉴저지주에서 이 곳으로 왔다는 존 존스씨는 “(트럼프에 맞서 대선에 출마한)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은 뒤에서 칼 꽂는 사람(back stabber), 론 디샌티스(플로리다 주지사)는 ‘디생티모니어스’(DeSanctimonious·신성한 척하는 디샌티스라는 뜻)”라며 “트럼프 말고는 눈을 씻고 봐도 후보가 없다”고 했다.

4일(현지 시각) 워싱턴DC 연방법원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반대 시위자 한 명이 트럼프 탈을 쓰고 있다. 이 시위자는 트럼프 목소리를 흉내내며 "감옥에 가기 싫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라며 그를 조롱했다. /이민석 특파원

트럼프 기소에 찬성하는 이들은 “이제 그를 가둬야 할때 “축하해야 할 날” “누구도 법 위에 없다” “드디어 세상이 옳게 돌아간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환호했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면서 행진하거나, 트럼프 탈을 쓴채 “감옥에 가기 싫고 무섭다” “멜라니아(트럼프의 부인)는 어디있느냐”며 흐느끼면서 트럼프를 조롱하는 이도 있었다.

4일(현지 시각) 워싱턴DC 연방법원 앞에서 한 트럼프 반대 시위자가 죄수복을 입고 '범죄를 저질렀으면 형기를 채워야 한다'는 문구와 함께 죄수복을 입은 트럼프 사진이 있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이민석 특파원

이날 법원 곳곳에서는 트럼프 찬반 세력이 말다툼을 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한 트럼프 반대 시위자가 트럼프 지지자를 향해 “당신은 바보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못 보고 있다”고 하자, 트럼프 지지자가 크게 웃으며 “누가 할 소리”냐며 “눈과 귀를 막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당신들이다. 정말 멍청하다”고 소리쳤다.

이날 법원 앞 분위기가 반(反)트럼프 쪽으로 쏠리자 트럼프 지지자인 40대 제이슨 허드슨씨는 기자에게 다가와 “오늘 세 번이나 민주당 지지자들이 내가 쓴 MAGA 모자를 보고 시비를 걸어왔다”며 “우리는 이렇게 평화롭게 할 말을 하는데 그들은 왜 우리에게 싸움을 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어 “그들은 논리로는 우리를 이길 수 없으니 이렇게 도발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2년 7개월전 이 곳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의회를 침입해 공권력을 무력화시켰던 장면이 연상되면서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