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인 1973년 8월 23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노르말름스토그 광장에 있는 한 은행에 한 명의 탈옥수가 경(輕)기관총과 칼, 로프 등을 갖고 난입했다. 허공에 총 몇 발을 쏘며 “파티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은행에 있던 여성 3명만 인질로 삼았다. 교활했다. 총선이 가까워, 정부가 여성 인질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구출 작전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나중에 이 범인의 요구로, 또 다른 은행 강도가 교도소에서 풀려나 이 인질극에 합류해 인질범은 2명이 됐다. 또 은행에 숨어 있던 남성 인질 한 명이 추가로 인질범들에게 발견돼 붙잡혔다.

1973년 8월24일 경찰 저격수와 사진기자들이 4명의 인질이 붙잡혀 있는 은행의 맞은 편 건물 옥상에서 몸을 낮추고 있다./AFP 연합뉴스

이 인질극은 6일 반을 끌었다. 그런데 마침내 항복한 범인들에게 경찰이 “인질부터 풀어주라”고 했을 때, 인질들은 처음엔 은행에서 먼저 나오기를 거부했다. 자신들이 나온 뒤, 범인들이 사살(射殺)될 가능성을 ‘걱정’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노르말름스토그 증후군’이었다. 인질로 잡힌 피해자가 억류된 일정 시점이 지나면 희망을 잃고 오히려 자신을 감금하고 학대한 범인과 정체성(正體性)을 동일시하고 유대감을 갖는다는 말이다. 스웨덴 밖에선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알려졌다.

이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경찰과 함께 사건을 조사한 스웨덴의 정신과 의사 닐스 베제로트였다. 그는 “여성 인질 중 한 명은 범인과 성적(性的)인 뉘앙스를 포함한 감정적 유대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50년 전 스톡홀름 은행에 1주일 간 붙잡혔던 인질 4명. 오른쪽 상단이 세계 최초의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로 지목된 크리스틴 엔마크./자료사진

그 여성은 당시 은행에서 속기사로 일하다가 감금됐던 23세의 크리스틴 엔마크였다. 엔마크는 풀려난 뒤, 취재진이 보는 가운데 경찰에 끌려가는 두 번째 범인에게 “또 보자”고 외쳤다. 엔마크는 전세계에서 ‘스톡홀름 증후군’을 앓은 첫번째 ‘환자’가 됐다.

이어 몇 달 뒤인 1974년 2월, 미국의 언론ㆍ출판 재벌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손녀 패티 허스트(당시 19세)가 극좌 테러 집단인 심바이오니스(Symbionese) 해방군(SLA)에 납치됐다.

자신을 납치한 극좌 테러 조직의 적극적인 일원이 된 패티 허스트. 그의 심리적 동기는 지금도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자료사진

패티 허스트는 이후 이 SLA에 ‘자원’ 입단해서 3건의 은행 강도 범죄에 적극 가담했고, 1975년 9월에 체포됐다. 막대한 부를 지닌 집안의 상속녀가 자신을 납치한 집단과 함께 강도 짓을 하면서 ‘스톡홀름 증후군’은 다시 유행어가 됐다.

◇용어를 만든 사람도 인질을 인터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스톡홀름 증후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 증후군은 지금까지도 미국 정신의학협회의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에 오른 적이 없다. 이런 증상을 입증할 학문적 데이터가 없고, 어느 누구도 이를 새로운 질환ㆍ장애로 인정해야 한다고 요청한 바도 없다. 게다가 이 용어를 처음 만든 스웨덴 정신과 의사 베제로트도 ‘최초의 환자’ 크리스틴 엔마크를 단 한 번도 인터뷰한 적도 없다. 진단할 만한 어떤 기준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추정’으로 용어를 만들었다.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 엔마크는 이후 심리치료사가 됐다. 이제 70대에 접어든 엔마크는 수십 년 간 ‘구출하려는 경찰이 아니라, 범인들을 신뢰했다’는 낙인에 시달려야 했다. 엔마크는 수년 전부터 “나는 당시 범인과 어떤 애정도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서만 행동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미국 ABC 방송 인터뷰에서 “‘경찰에게 이상적인 인질은 입 다물고 경찰이 자신을 구해주리라고 확신하는 여성일 것”이라며 “내가 잘못한 것일까라는 죄책감으로 수십 년을 지냈다”고 말했다.

이제 73세가 된 크리스틴 엔마크(왼쪽)/출처: 앨런 웨이드

엔마크는 “23세의 나에 대해 존경심밖에 없다. 그들이 신문에 뭐라고 쓰든,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내 스토리를 알고, 내 진실을 아니까”라고 말했다.

그를 장시간 인터뷰한 캐나다의 심리치료학자 앨런 웨이드 박사는 ABC 방송에 “엔마크는 가장 용감한 여성이었고, 심리학계에서 가장 크게 오해를 받는 여성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은행 금고에서 인질범들과 보낸 6일 반

1973년 8월 23일 선글래스에 가발을 쓴 여장(女裝) 차림의 탈옥수 얀-에릭 올손이 스톡홀름의 스베리에스[스웨덴] 크레디트뱅크에 들어갔다. 미국식 액센트 영어로 “파티가 시작했다”며 허공에 총을 쏴댔다.

요구 조건은 300만 스웨덴 크로나(현재 원화로 약 45억 원 가치)와 교도소 동기인 금고털이 전문범 클라크 올로프손의 합류, 2개의 총과 2개의 방탄 조끼, 푸른색 포드 머스탱 차량이었다. 올로프손과 이 인질극을 사전 모의한 것은 아니었다. 스웨덴 경찰은 모든 조건을 다 들어줬다. 머스탱 차량의 시동 키를 빼놓은 것만 빼고.

당시 은행 속기사였던 크리스틴 엔마크는 1974년 미국 잡지 뉴요커 인터뷰에서 “이런 일은 미국에서나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한 미치광이가 내 인생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범인 올손은 탈주 계획이 틀어지자, 공황에 빠졌다. 두 명이 된 범인은 여성 3명, 남성 1명의 인질을 끌고 은행 속 금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범 올손을 그나마 진정시킨 것은 원치 않게 이 인질극에 합류하게 된 올로프손이었다. 엔마크는 2017년 한 팟캐스트에서 “올로프손이 합류한 뒤 상황이 매우 달라졌다. 그는 ‘올손이 결코 당신을 해치지 않게 하겠다’며 나를 달랬다”고 말했다.

스웨덴 경찰도 황당한 실수를 했다. 얀-에릭 올손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자, 경찰은 엉뚱한 다른 탈옥수의 동생을 은행에 들여보내 ‘형’을 설득하도록 했다. 올손은 그를 향해 총을 쐈다.

금고 안에는 외부와 연결된 전화가 설치됐고, 인질들은 가족과 안부 전화를 할 수 있었다. 기자들도 계속 상황을 물어왔다. 한 스웨덴 신문은 이를 “폭력 포르노 중계”라고 했다.

◇범인이 되레 인질들에 유대감 형성?

경찰이 범인 정체도 파악 못하자, 여성 인질 엔마크는 직접 올로프 팔메 총리에게 전화했다. “당신은 우리 목숨을 놓고 체스를 두느냐. 나는 두 범인을 신뢰한다. 우리에게 아무 짓도 안 했다. 그들 요구를 들어주라”고 간청했다. 팔메는 당연히 거절했다.

인질극 3일째 되는 날, 경찰은 금고 문을 닫았다. 조금 열린 문으로 공급되던 음식도 끊겼다. 그날 오후 주범 올손은 이전 음식에서 남았던 배 3개를 꺼내 각각 반으로 쪼갰다. 인질들은 올손이 가장 작은 조각을 먹는 것을 봤다.

뉴요커 인터뷰에서, 엔마크는 “밤에 6명이 금고 안에서 잘 때는 서로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동시에 호흡하는 것을 느꼈고, 나도 거기에 맞추려고 했다. 금고 안은 우리의 세계였고, 살려고 숨을 쉬었다. 이 세계를 위협하는 자는 누구든지 우리의 적이었다”고 말했다.

경찰이 금고 천장에 구멍을 뚫어 최루가스를 넣으려 하자, 주범 올손은 구멍 바로 밑에 인질 1명을 번갈아 세워 목에 로프를 걸고 벽에 고정시켰다. 최루가스에 질식돼 인질이 쓰러지는 순간엔, 바로 로프에 목이 걸려 죽게 하겠다는 협박이었다.

그런데 인질이 너무 피곤해 하자, 남자 인질의 요청을 받아 범인 올손이 직접 그 밑에 서기도 했다. 인질범이 대신 인질이 돼 주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경찰은 인질 희생을 막기 위해, 모두 7개의 구멍을 뚫었다. 그러나 남자 인질이 “최루 가스를 넣지 말라”고 애원했다. 경찰의 구출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됐고, 2명의 범인은 바닥에 쓰러져 항복했다.

속기사 크리스틴 엔마크는 자신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것은 경찰이라고 믿었고, 법정에서 두 범인에 대한 진술을 거부했다.

정신과 의사 베제로트는 엔마크의 심리를 ‘노르말름스토그[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그는 “납치되고 일정 시점이 지나면, 피해자와 인질범 사이에 우정의 감정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심지어 주범 얀-에릭 올손도 경찰 조사에서 “매일 함께 역경을 견디다 보니까, 서로 친숙해져서 죽이기도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올손은 나중엔 스웨덴의 ‘셀러브티리 갱스터(celebrity gangster)’가 됐다.

엔마크는 2016년 한 인터뷰에서 “모두 인질 피해자들을 비난하는데, 내가 한 모든 것은 생존 본능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그게 이상한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물었다.

◇사건 종결된 뒤, 실제로 사랑에 빠진 범인과 인질

사건이 해결되고, 다시 교도소로 돌아간 두번째 범인 올로프손과 엔마크는 서신 교환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둘은 진짜 사랑에 빠졌고, 1979년 가석방된 올로프손이 저널리즘 스쿨에 등록했을 무렵엔 두 사람은 합의 하에 임신했다. 그러나 엔마크는 자궁외임신으로 태아를 잃었고, 이후 두 사람 관계는 ‘열정’에서 ‘우정’으로 변했다.

엔마크는 다른 남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지만, 작년 스웨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올로프손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경찰이 직접 물어도, 아무 말 못했던 피랍 소녀

2002년 6월4일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열네살 소녀 엘리자베스 스마트가 잠자던 중에 납치됐다. 납치범 부부는 그를 성폭행했고, 감금했다. 그러나 나중엔 베일을 씌워서, 버젓이 시내를 함께 돌아다니기도 했다.

피랍 두 달 뒤에, “납치된 소녀와 비슷하다”는 제보를 받은 한 형사가 시내 공립도서관에서 납치 부부와 ‘딸’ 스마트를 맞닥뜨렸다. 범인 부부에게 스마트의 베일을 걷어 달라고 했지만, 부부는 종교적 이유로 들어 거부하며 “딸이 납치됐다면 왜 지금 가만히 있겠느냐”고 했다. 스마트는 자신이 구출될 수 있었던 그 순간에, 침묵했다.

결국 피랍 9개월 뒤인 이듬해 3월, 다른 경찰이 스마트를 납치범 부부로부터 강제로 떼어 놓은 뒤에야 스마트는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때도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던 스마트는 “네가 스스로 (그 공포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경찰의 설득에, 간신히 자신이 납치된 소녀임을 밝혔다.

그때도 일부 학자는 스마트 사건이 ‘학대하는 범인이 인질의 생명 유지를 가능케 한 유일한 사람이 되면서 납치범이 양육인이 된 케이스”라며, 스마트의 침묵을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했다.

2013년 기자와 인터뷰하는 엘리자베스 스마트/자료사진

그러나 스마트는 2013년 뉴요커 인터뷰에서 “피랍 기간 중 범인 부부는 ‘달아나기만 하면, 가족까지 모두 죽이겠다’고 늘 협박했다”며 “애정이 있어야 범인에게 순종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공포(fear)만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앞서, 언론 재벌 허스트의 손녀 경우에는, SLA 극좌 테러범들이 패티 허스트를 성폭행ㆍ학대하고 마약을 투여하면서 ‘가족이 너를 버렸다’고 세뇌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변호인은 “테러범들이 끊임없이 극좌 혁명적 세계관을 주입시켰고, 허스트는 일부는 받아들이고 일부는 살아나기 위해서 조직원으로서 그들의 범죄에 적극 가담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스트는 7년 형을 선고받았다. 2년 뒤 지미 카터 대통령은 감형(減刑)해 그를 석방시켰고, 빌 클린턴은 허스트를 사면했다. 배우이자 유명 인사가 된 허스트의 범행 동기는 지금도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