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산에 합의하지 못했던 미 연방의회는 새 회계연도가 시작하는 10월1일 0시를 수시간 남기고 9월30일 일단 11월17일까지 45일간 쓸 수 있는 임시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30일 밤 이 임시예산안에 서명했다.
그런데 이 예산법안에는 애초 바이든 행정부가 요청했던 240억 달러(약 32조4730억 원)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군사원조액이 빠졌다.
지난 1월 공화당 의원들이 미 하원을 장악한 이래, 우크라이나에 대한 계속된 지원에 대한 반발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공화당 하원 의원들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지원을 통해 얻으려는 군사적 목표와 지원 기간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히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이래 우크라이나에 460억 달러(약 62조1837억 원) 어치의 군사 원조를 제공한 것을 포함해, 우크라이나와 인근 국가에 경제ㆍ인도주의 목적으로 지금까지 1130억 달러(약 152조 6822억원)를 지원했다.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 피로증’을 반영하듯이, 9월29일 매트 가에츠 공화당 하원의원(플로리다)이 제출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일체의 군사 원조를 금지하는 법안에는 공화당 하원의원 93명이 찬성했다. 지난 7월 같은 법안에 찬성한 공화당 하원의원 수는 70명이었는데 그새 20명 넘게 더 늘었다. 상원의 공화ㆍ민주 양당 지도부는 이번 임시 예산안에 일단 60억 달러의 우크라이나 군사지원 예산을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마지막에 포기했다.
이에 앞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9월21일 백악관을 방문해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as long as it takes) 돕겠다”는 약속을 재확인 받았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당시 미 의회 상ㆍ하원 합동연설을 요청했으나,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공화)은 이를 거절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군사지원 예산이 빠진 임시 예산안에 서명한 뒤 “우리 동맹국들은 우리의 지원을 믿어도 된다. 우리는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미 상원의 공화ㆍ민주 양당 지도부 6인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요한 지원은 수 주 내에 확실히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공화당 유권자 62%는 ”너무 많이 지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8월 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 공화당 유권자의 62%는 “우크라이나에 너무 많이 지원했다”고 답했다. 4월 조사에서 이런 응답은 56%였는데, 계속 확산됐다. CNN 방송의 8월 초 여론조사에서도 전체 응답자의 55%가 신규 무기 지원에 ‘반대’했다. 민주당 성향 응답자의 62%가 ‘찬성’한 반면에, 공화당 성향 응답자는 무려 71%가 ‘반대’했다.
공화당이 처음부터 우크라이나 군사ㆍ경제 지원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침공 초기인 작년 4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신속한 무기 이전을 위한 법안인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수호 대여법안’에는 공화당 하원에서 불과 10명만 반대했다.
작년 3월5일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결의에는 공화당 하원의원 3명, 3월17일 러시아에 대한 무역 금수(禁輸) 조치에는 8명만 반대했다. 10명 안팎이었던 이들은 동료 공화당의원들로부터 ‘푸틴파(派ㆍPutin’s wing),’ 민주당으로부터는 ‘푸틴 일당(Putin’s Caucus)’라는 조롱을 받았다.
◇트럼프 “바이든은 우크라이나 퍼스트, 아메리카 래스트”
그러나 올 여름 기대했던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이 별로 진전 없이 1차 대전 양상과 같이 지루한 참호전으로 변하고 끝없이 군사 지원이 계속되면서 우크라이나 피로증이 커졌다.
내년 미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 도널드 트럼프 전(前) 대통령의 영향도 컸다. 그는 지난 5월10일 CNN 방송이 주관한 뉴햄프셔 주 타운홀 미팅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전쟁을 멈춰야 한다. 나는 (당선되면) 24시간 내에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저지하기를 원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도 “나는 이 전쟁을 이기고 지는 측면에서 보지 않는다”고 답했다.
트럼프는 또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바이든 집안의 부패 혐의에 대한 철저한 조사, 멕시코와의 국경 보호 등의 이슈와 연결지었다. 그는 9월26일과 28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미시건 주 집회에서도 “하루에 수천, 수만 명이 불법 입국하고 있다”며 “바이든은 중국ㆍ멕시코ㆍ우크라이나를 퍼스트(first)에, 미국은 래스트(last)에 놓는다”고 비난했다.
이번 임시예산안 통과를 앞두고도, 친(親)트럼프계인 극우 성향의 ‘프리덤 코커스’ 소속 공화당 하원의원들은 “(멕시코와의) 국경 보호가 핵심”이라며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이 포함되든 안되든, 국경보호 예산이 없으면 임시 예산안에는 반대”라고 밝혔다.
이 코커스 소속인 로렌 보버트 하원의원은 지난달 젤렌스키의 백악관 방문에 “또 수표 받으러 왔느냐. 만나서 돈 돌려달라고 말해야겠다”고 반응했고, 마저리 테일러-그린 의원은 “이미 너무 많은 원조가 제공됐다.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51번째 주는 아니다”고 했다.
◇”국경은 방치하고, 우크라이나 도우라고?”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에 반대하는 공화당 강경파인 마이클 월츠 하원의원은 지난 달 18일 폭스뉴스 웹사이트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 의회의 백지수표 시대는 끝났다”는 제목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그는 “7월 한 달에 13만 명의 불법월경자가 체포됐는데, 미국 납세자들에게 남쪽 국경은 방치하고 우크라이나 방어에 돈을 쓰라고 지원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지원은 유럽이 더 부담하고, 미국은 국경을 보호해야 한다”며 공화당 의원의 최소 절반이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군사 지원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면서도 “조지 부시 대통령은 1차 이라크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각국을 돌며 전비(戰費)를 분담하도록 했는데, 바이든은 GDP의 2% 국방비 증액 요구도 유럽 국가들에 관철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월츠는 또 바이든 대통령의 ‘기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돕겠다’는 말은 구호이지 전략이 아니다며,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이전 국경선으로 물러날 때까지인지, 푸틴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인지 뚜렷한 지원 목표도, 기간도 없다고 비판했다.
◇공화당 상원의원들과 다른 대선 후보들은 신중
한편, 짐 리시 공화당 상원의원(아이다호)은 “1994년에 미국이 우크라이나에게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안보를 보장했던 사실을 미국인에게 설명해야 한다”며 “우리가 이 약속을 깨면, 우리의 동맹국들과 적은 미국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며, 모두 ‘우리도 핵무기가 있어야겠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경선에 나선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이나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 같은 이들도 미국의 국경 보호 필요성과는 별개로,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은 차질없이 계속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펜스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게 허용한다면, 이는 중국에게 타이완을 침공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척 슈머 상원 다수당 대표(민주)는 “현실 감각이 전혀 없는 한 줌의 극단적인 정치인들이 우크라이나를 포기하게끔 강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앞으로 수년 내에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