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의회가 30일(현지 시각) ‘셧다운(정부 공무원들의 급여 지급 및 일부 업무 중단)’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45일간의 임시 예산안을 처리했다. 미국의 새 회계연도가 시작하는 10월 1일 0시 전 정부 예산이 처리돼야 셧다운을 피할 수 있는데, 자정을 불과 3시간 앞두고 상·하원 문턱을 통과한 것이다. 그러나 셧다운 처리 과정에서 공화당 내 ‘집안 싸움’이 격화되면서 임시 예산안 효력이 끝나는 11월에 또 다시 여야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벼랑 끝 대치를 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공화당 내 강경파가 자신들의 수장인 하원의장을 축출하는 절차를 밟겠다는 계획을 공식 발표하면서 내년 대선을 앞두고 하원 공화당 리더십에 변화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공화당 내 ‘강성 10%’에 끌려다니는 美 의회

케빈 매카시 미 연방 하원 의장. /신화 연합뉴스

이번 ‘셧다운 모면’ 사태는 공화당 내 10%에 불과한 소수의 강성 의원들이 지도부를 어떻게 꼼짝 못하게 만들었는지를 잘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들이 사실상 ‘캐스팅 보트’를 쥐고 주요 국면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당초 셧다운은 정부 예산안을 대폭 삭감해야 한다는 야당 공화당 내 강경파와 현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여당 민주당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지난 29일 공화당 소속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이 주도한 임시예산안은 하원에서 찬성 198표 대 반대 232표로 부결됐었다. 연방정부 기관들의 예산액을 대폭 삭감하는 내용을 담은 임시예산안이었지만, 대폭적인 예산 삭감을 요구하는 공화당 강경파 20여 명의 반대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공화당 내 초강경 우파 모임인 ‘프리덤 코커스’ 소속이다. 2015년 공화당 보수파 의원들이 세금 감면, 불법 이민 강경 대응, 작은 정부 지향 등을 내걸고 만든 의원 모임이다. 프리덤 코커스는 회원들의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대략 20여명의 의원들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번에도 정부 지출 대폭 삭감과, 국경 통제 정책 등 강경한 이민정책을 요구했다. 일부 의원들은 트럼프 수사를 지휘한 연방수사국(FBI)의 예산 대폭 삭감 등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지난 5월 민주·공화당이 미 부채한도 상향과 함께 정부 지출 총액을 합의했음에도 ‘예산을 추가로 줄여야 한다’고 버틴 것이다. 공화당 내에서 조차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합의라는 의회 전통을 무시하고 의회 기능 마비도 불사한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이 소수임에도 당의 움직임을 좌우하는 것은 공화당(221석)과 민주당(212석)의 의석 차이가 거의 없는 상황을 이용한 것이다. 하원은 공화당 221석, 민주당 212석으로 구성돼 있다. 공화당에서 4표 이상의 이탈표가 나올 경우 어떤 법안이라도 통과시키는 게 불가능하다. 특히 이들 대부분이 친(親)트럼프 성향이라는 점에서, “공화당 전체가 소수 극단 트럼프계에 의해 휘둘리고 있다”는 지적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결국 매카시 의장은 30일 사실상 민주당 의원들의 요구에 맞춘 새로운 임시예산안을 내놨다. 오는 11월 17일까지 연방 정부 예산을 기존 수준으로 동결하는 내용을 담은 새 임시 예산안은 공화당 강경파들이 요구해온 예산 대폭 삭감안을 반영하지 않았다. 또 바이든 대통령이 요구한 재난 지원 예산 160억 달러(약 22조원) 증액은 전면 수용했다. 사실상 민주당 의원들의 지지를 구하고, 당내 강성파들의 반대는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하원 강경파 의원들은 “의장이 민주당과 야합했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매카시 의장은 “누군가가 내가 이곳에서 어른스럽게 행한다는 이유로 나를 몰아내려 한다면 그렇게 한번 해 보라. 그러나 나는 이 나라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반박했다.

◇강경파들 “주말 끝나고 불신임안 제출” 엄포

실제 임시예산안 통과 직후 매카시 의장 자리는 위협받게 됐다. 이들 강경파 의원들이 매카시에 대한 불신임안(motion to vacate)을 상정할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전면에서 지휘한 맷 게이츠 하원의원(플로리다)은 1일 CNN 인터뷰에서 “이번 주 불신임안을 제출할 계획”이라며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셧다운 위기를 앞두고 예산안의 발목을 잡았던 미국 공화당 강경파 중 한명인 맷 게이츠 하원의원이 30일(현지 시각)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AFP 연합뉴스

앞서 매카시 의장은 지난 1월 15차에 걸친 투표 끝에 겨우 하원의장으로 선출됐었다. 하원의장 선출을 위한 투표가 10차 이상 이뤄진 것은 1859년 이후 164년 만의 일로, 그 때에도 프리덤 코커스 의원들의 반대 때문에 선출이 지연됐었다. 의장 당선에 필요한 과반 표를 얻지 못했던 매카시는 이들과의 협상을 통해 분위기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당시 강경파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 중 하나가 단 한 명의 의원이라도 나설 경우 의장 불신임 투표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원래는 코커스(당내 의원들의 모임) 단위 이상의 단체가 추진할 경우에만 불신임 투표를 진행하도록 해왔는데, 이 요건을 대폭 완화한 것이다.

이들 공화당 강성파들이 불신임안을 제출하면 이틀 이내에 표결을 진행해야 하는데 하원의 과반이 찬성할 경우 의장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게이츠 의원은 “매카시가 하원의장직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민주당이 그를 구제하는 것”이라며 “(나는) 민주당이 매카시에게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민주당이 매카시의 의장직 유지를 돕는다면, 그는 공화당이 아닌 그들(민주당)의 의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친트럼프’ 인사인 맷 게이츠 의원은 매카시 의장이 상정한 임시예산안을 반대한 핵심 인물이라고 CNN은 보도했다.

미 의회 역사상 의장 불신임안이 실제 표결까지 간 사례는 없다. 다만 지난 2015년에도 존 베이너 공화당 하원의장이 당내 강성파들과 예산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다가 마크 메도우스 공화당 의원이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 안은 실제 표결에 이뤄지지는 않았고, 결국 베이너 의장은 자진 사퇴했었다. 이 때문에 이번에도 실제 하원 불신임안이 표결까지 갈 지는 미지수라는 관측이다.

다만 실제 표결로 가더라도 매카시가 의장직을 내려놓게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분석이다. AP는 “매카시 하원의장은 당내 대다수 의원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했다. 다만 “공화당이 근소하게 과반인 상황이라는 점에서 해임결의안 부결을 위해서는 민주당의 표가 일부 필요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