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시각으로 23일 오전 2시 3분. 미국 최대 명절 추수감사절로 막 접어든 한밤중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 계정에 동영상 19개가 잇따라 올라왔다. 짧게는 10초, 길게는 2분가량인 동영상에서 똑같은 옷차림으로 등장한 그는 내년 대선에서 재대결이 유력한 현직 조 바이든 대통령, 자신의 재판을 맡은 판사와 검찰, 공화당 당내 경쟁자 등을 겨냥해 공격적 발언을 쏟아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 최대 연휴인 추수감사절 새벽인 23일(현지 시각) 오전 2시3분 트루스소셜에 올린 영상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이날 그가 하루에만 올린 영상과 글, 사진은 38개 달한다. /트루스소셜 캡쳐

소셜미디어 집착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트럼프지만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에 폭풍 게시물을 올린 경우는 흔치 않다. 온 가족이 모인 추수감사절 저녁 밥상의 화제가 되도록 의도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CNN은 “트럼프가 모욕 명단이 들어 있는 추수감사절 메시지를 게시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게시물의 주 타깃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었다. “내년 대선에서 비뚤어진(crooked) 바이든이 이끄는 빈곤하고 나약한 미국, 아니면 트럼프가 이끄는 평화와 번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바이든이 부인 질 바이든 여사에게 전화하는 것처럼 합성된 장면에 “또다시 내가 차에 키를 놓고 문을 잠갔어”라는 대사를 넣은 게시물도 올렸다. 사진 속 차는 지붕이 없는 오픈카였다. 잦은 말실수 때문에 바이든의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히는 ‘나이 리스크’를 겨냥한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바이든 행정부 관료들에 대해선 “공산주의자, 파시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우리나라를 파괴하려고 한다”고 했다. 자신이 바이든에게 패배한 지난 2020년 대선이 사기극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내년 미국 대선의 공화당 경선 후보로 나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 11일 뉴햄프셔주(州) 클레어몬트(Claremont)에서 열린 유세 현장에 나서고 있다. /로이터 뉴스1

트럼프는 자신의 ‘사법 리스크’를 역공 소재로도 활용했다. 백악관 기밀문서 유출, 극성 지지자 의회 난입 선동, 선거 결과 조작 시도 등의 혐의로 회부된 형사재판의 판사와 수사검사를 ‘사이코’ ‘급진 좌파’ ‘인종차별주의자’ 라고 불렀다. 트럼프그룹 자산 가치 조작 의혹 사건을 맡은 검찰과 판사를 겨냥해선 “없는 사건을 만들어 정치적 마녀사냥을 벌인 그들이 기소감”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적진만 겨냥하지 않았다. 공화당 대선 후보 경쟁자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에 대해 “‘디생티모니어스(DeSanctimonious)’의 지지율이 반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디생티모니어스’는 트럼프가 디샌티스를 비하하려고 그의 이름 앞부분과 독실한 척한다는 뜻의 단어 ‘sanctimonious’를 합친 것이다. 한때 트럼프의 대항마로 거론되다 2위 자리마저 위협받고 있는 디샌티스를 조롱한 것이다.

나라 밖 사안도 언급했다. “(내가 현직이었다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고, 이스라엘이 (하마스에서) 공격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적국들에서) 사상 최고 수준의 위협을 받는데, 법무부와 FBI(연방수사국)는 트럼프만 쫓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래픽=이철원

트럼프는 날이 밝은 뒤 18개를 더 올렸다. 하루 동안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37건 쏟아낸 것이다. 개인 감정을 쏟아내면서도 국내 정책과 외교 문제 등까지 소재로 다뤘다. 공화당 당내 대선 후보 경쟁에서 독보적 선두를 달리는 트럼프가 바이든에게도 지지율이 앞선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잇따라 나오자 ‘추수감사절 폭풍 게시물’로 지지층을 결속하고 대세론을 전파하려는 의도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최근 발표된 에머슨대 여론조사 양자 대결 구도에서 트럼프(47%)는 바이든(43%)을 앞섰고, 하버드대 여론조사에서도 트럼프(48%)가 바이든(41%)을 더 넉넉하게 앞섰다.

‘트럼프 시즌2′가 현실화할 경우 미국 정치권은 물론 세계를 혼돈에 빠뜨렸던 트럼프식 ‘소셜미디어 정치’가 부활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라인스 프리버스 전 백악관 비서실장이 회고록에서 트럼프가 TV를 보면서 트위터를 했던 침실을 ‘악마의 작업장’, 트위터 글을 쓰는 새벽을 ‘마녀의 시간’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트럼프는 2021년 1월 6일 지지자들의 연방 의사당 난입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페이스북·트위터 계정이 정지되자 작년 2월 직접 트루스소셜을 출시했다. 트위터는 지난해 일론 머스크에게 인수돼 X로 바꾸면서 트럼프의 계정 정지 조치를 해제했고, 트럼프는 트루스소셜 게시글 상당수를 X에도 싣고 있다.

한편 바이든은 향후 선거전에서 트럼프의 과격성을 집중 부각하기로 했다고 로이터가 이날 보도했다. 바이든 캠프 관계자는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시행할 정책의 법적 문제, 그의 과격한 언사 등을 강조할 것”이라고 했다. 경제 성과를 강조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트럼프의 위험성을 부각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