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향년 100세로 29일(현지 시각) 코네티컷주(州)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는 “(리처드 닉슨과 제럴드 포드) 두 대통령 하에서 세계 정세를 형성했던 키신저가 세상을 떠났다”며 “그는 미국 국제 문제와 정책 형성에 비할 데 없는 지배력을 발휘했던 외교관이지만 그를 절조와 도덕관념이 없다고 보는 비판 세력의 끊임 없는 공격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23년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태어났다. 교사였던 부모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가족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에 정착했다. 미국에 도착할 당시 그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평생 강한 독일어 억양을 유지했다.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키신저는 그해 미 육군에 징병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1945년에는 방첩 활동의 공로를 인정 받아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귀향장병 지원법에 따라 하버드대에 입학해 1950년 문학 학사를, 1952년과 1954년 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워싱턴DC에서 명성을 얻기 전에 이미 하버드대 교직원으로 기반을 마련했다.
1969년 닉슨 당시 대통령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면서부터 그는 미국 국제관계에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갔다. 키신저는 1969년 1월부터 1975년까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고, 1973년 9월부터는 국무장관도 겸하게 됐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동시에 지낸 사람은 지금까지도 키신저가 유일하다.
키신저는 냉전 관계였던 소련과의 데탕트(긴장 완화)를 추진했다. 1969년부터 미국과 소련과의 전략 핵무기 제한 협상을 시작해 1972년 전략무기제한협정 1차 조약(SALT I)을 타결시켰다. 1973년 1월 파리에서 북베트남정부와 회담을 가지고 미군 철수와 남북 베트남정부의 평화정착을 위한 기구설정을 내용으로 하는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그는 이 공로로 베트남 협상 대표인 레둑토와 함께 1973년 노벨평화상을 탔다.
같은 해 제4차 중동전쟁 때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를 오가며 중재자 역할을 해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고 적대관계를 휴전으로 유도했다. ‘셔틀외교’란 말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의 일이다.
키신저 외교의 ‘하이라이트’는 중국이었다. 키신저는 1971년 7월 9일 핑퐁외교를 앞세워 수십 년 동안 높게 둘러쳐 있던 ‘죽(竹)의 장막'을 열고 중국 땅에 발을 내디딘 미국의 첫 외교관이었다. 당시 파키스탄을 방문했던 키신저가 “배가 아파 호텔에서 쉬겠다”며 언론을 따돌린 뒤 전세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날아간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와 저우언라이(周恩來) 비밀회담은 이듬해 닉슨·마오쩌둥(毛澤東) 정상회담을 거쳐 1979년 미·중 수교로 이어졌다. 키신저는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수십 차례 중국을 오가며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시진핑(習近平) 등 중국 현대사를 이끈 지도자와 직접 대화·교류하며 양국관계의 가교 역할을 했다. 중국인도 키신저를 ‘인민의 오랜 친구(老朋友·라오펑요우)’라고 부르며 최고 예우를 갖췄다.
그는 이같은 중국 지도자들과의 대화, 각종 외교문서, 회고 등을 종합해 88세 때인 2011년 ‘중국 이야기’(On China)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여기서 키신저는 “중국의 대외전략은 기본적으로 방어에 있었다. 주변 이민족들이 뭉쳐서 중국에 도전하는 일만 없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뿌리 깊은 전통에서 나타난 것이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무찌른다) 정책이다. 이것이 중국 외교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의 위협이 점증하고 미중 관계가 악화하면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했던 키신저의 정책이 단견(短見) 아니었냐는 비판도 커졌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자주 중국을 드나든 것 역시 ‘친중(親中)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컨설팅회사 ‘스트레티지 리스크'의 아이작 스톤 피쉬 창업자는 지난해 발간된 ‘아메리카 세컨드: 어떻게 미국 엘리트들이 중국을 강하게 만들었나'란 책에서 키신저가 공직에서 물러난 후 미국 기업들과 중국 정부를 연결해 주며 ‘중국의 영향력 공작원'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혹평했다.
키신저의 추종자들은 칠레·키프로스·동티모르 등의 전쟁과 분쟁에 개입한 그가 ‘현실정치(Realpolitik)’를 했다고 평가하지만, 비판적인 이들은 원칙과 윤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1969~73년의 캄보디아 폭격과 관련해선 ‘전범’(戰犯) 취급을 받기도 했다. 권력을 잡고 있던 시절 여배우과 숱한 염문을 뿌리는 등 사생활로도 유명세를 탔다. 당시 추문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권력은 최고의 최음제”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