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베이징, 마오쩌둥 손잡은 키신저 - 1975년 2월 2일 중국 베이징의 주석 관저에서 헨리 키신저(오른쪽) 미국 국무장관이 제럴드 포드(가운데) 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 정상화는 키신저가 남긴 최대 외교 성과로 꼽힌다. 그는 1971년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해 관계 개선의 물꼬를 텄고, 두 나라는 1979년에 정식 수교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70년대 냉전기 ‘핑퐁 외교’를 통해 공산 중국의 ‘죽(竹)의 장막’을 열고, 소련과의 전략 핵무기 제한 협상을 통해 ‘데탕트(긴장 완화)’를 유도했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29일(현지 시각) 100세로 별세했다.

12명의 역대 미국 대통령에게 정책 조언을 하고 마오쩌둥부터 시진핑까지 중국의 모든 최고지도자를 만났던 키신저는 국제정치의 ‘살아 있는 역사’였다. 키신저는 1969~1975년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는데, 1973년 9월부터 국무장관도 겸했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동시에 지낸 사람은 키신저가 유일하다.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면 적과도 타협했던 그는 ‘현실정치(Realpolitik)’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냉전기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한 것이 대표적이다. 소련과의 전략 핵무기 제한 협상을 시작해 1972년 전략무기제한협정 1차 조약(SALT I)을 타결시켰고,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때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를 오가며 중재자 역할을 도맡은 ‘셔틀 외교’로 군사적 긴장을 해소했다. 하지만 윤리나 원칙 없이 약소국의 이익과 인권을 희생시켰다는 비판도 그를 따라다녔다.

일례로 키신저는 북베트남과 체결한 파리 평화협정을 통해 베트남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지만, 남베트남은 미군 철수 후 2년 만인 1975년 패망했다.

그래픽=김성규

1971년 7월 9일 중국 베이징에 도착한 파키스탄발 비행기에서 당시 48세의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내렸다. 파키스탄 방문 중 “배가 아파 호텔에서 쉬겠다”고 언론을 따돌리고 극비리에 중국에 온 것이다. 석 달 전 미국 탁구선수들이 마오쩌둥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던 ’핑퐁 외교’로 중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적대감이 누그러지자,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6·25전쟁에서 총구를 겨눴던 적성국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타진하며 키신저를 급파했다.

닉슨은 대선 승리를 안겨준 공약 ’베트남전에서의 명예로운 철수’를 지키기 위해 중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소련과의 냉전 경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서도, 중국과 전략적으로 손잡을 필요가 있었다. 중국 입장에선 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하고 자국의 국제사회 진입을 위해 미국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물밑협상은 유엔에서 대만 축출(1971년 10월), 닉슨의 중국 방문(1972년 2월), 베트남전 종전(1975년 4월) 등 1970년대 격변의 물꼬가 됐다. 이념·감정은 제쳐두고 철저히 실용과 이익만을 따지는 키신저의 현실정치가 강력하게 구현된 장면이었다.

힘을 최우선시하는 그의 냉정한 외교철학은 난민 출신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추구했던 유년 시절과 무관치 않다. 그는 1923년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8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시민권을 얻은 스무 살에 징집돼 고향 독일에 배치됐다. 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은 그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방첩부대에서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 요원 추적팀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로 동성(銅星)무공훈장을 받았고, 제대 군인 지원정책으로 하버드대에 진학해 학사·석사·박사과정을 마쳤다. 모교 교수 임용 뒤에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행정부의 대량 보복 전략을 비판하면서 전술핵과 재래식 무기를 배합하는 것만으로도 소련의 위협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 저서 ‘핵무기와 외교정책’으로 주목받았다. 1969년 취임한 닉슨은 키신저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했고, 그의 주장은 훗날 미 핵무기 정책의 근간이 됐다.

키신저 현실정치의 대전제는 “미국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을 뿐이며 오직 이해관계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민주국가 남베트남 수호 명분으로 1964년 베트남전에 본격 참전한 미국이 9년 만에 발을 빼는 과정 역시 키신저가 주도했다. BBC는 “키신저는 설사 이긴다고 하더라도 철수로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못할 것으로 결론 내린 상태였다”고 전했다.

역대 한국 대통령들과도 만나 -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역대 한국 대통령들과도 만나서 한반도 정세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① 1973년 11월 16일 방한해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는 모습. ② 1983년 3월 30일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는 모습. ③ 1995년 10월 24일 뉴욕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이야기하는 모습. ④ 1999년 10월 23일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의 악수하는 모습. ⑤ 2010년 3월 12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접견 모습. /조선일보·청와대사진기자단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통해 1973년 1월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적시한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됐다. 키신저와 북베트남 공산당 지도자 레득토는 그해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레득토는 “조국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미군의 철수 방침이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 북베트남은 2년 뒤 대규모 병력을 앞세워 남베트남을 침공해 패망시켰다. 키신저의 노벨상은 논란의 노벨평화상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다.

1973년 9월 칠레 쿠데타로 좌파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축출되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철권 통치가 시작됐다. 당시 이 쿠데타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물밑에서 지원하도록 비밀 작전을 승인한 당사자도 키신저였다. 그는 자신의 외교노선이 논란을 일으킬 때마다 “미국은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고, 오직 이해관계만 있을 뿐”이라거나 “외교정책에 있어 도덕적 완벽함을 요구하는 나라는 완벽함도 안보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강경 발언으로 맞받아쳤다.

키신저의 외교 행보가 갈등과 파국만 초래한 것은 아니다. 1969년부터 소련과의 전략 핵무기 제한 협상을 시작해 1972년 전략무기제한협정 1차 조약(SALT I)을 타결시켰고,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때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를 오가며 중재자 역할을 도맡은 ‘셔틀 외교’로 군사적 긴장을 해소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1974년 8월 닉슨이 사임했지만, 키신저는 후임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도 국무장관으로 중용됐다. 은퇴 이후에도 현역 못지않은 왕성한 집필·강연·기고 활동을 이어갔다. 95세 무렵부터 인공지능(AI)의 영향을 연구하기 시작해 98세가 된 2021년 에릭 슈밋 전 구글 최고경영자(CEO), 대니얼 허튼로커 매사추세츠공대(MIT) 학장과 함께 ‘AI 이후의 세계’란 책을 냈다. 그는 100세 생일을 앞두고 지난 5월 CBS 인터뷰에서 “하루 15시간쯤 일한다”고 말할 만큼 ‘은퇴 없는 삶’을 살았다.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대통령들은 빠짐없이 재임 중 그와 만나 외교 정책에 관한 조언을 들었다. 키신저와 같은 공화당 소속의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뿐 아니라 민주당 소속의 지미 카터,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그의 말을 경청했다.

키신저는 지난 5월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립으로 5년에서 10년 안에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두 나라는 공존 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후임 국무장관 8명이 세상을 떠나는 동안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100세 문턱을 넘은 그의 장수 비결도 외교 정책만큼이나 주목받았다. 그는 평소 돼지고기로 만든 독일 소시지 브라트부르스트 등 고열량 음식들을 즐겼다. 아들 데이비드 키신저는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아버지의 건강의 원천을 ‘지치지 않는 호기심’으로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