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향년 100세로 29일(현지시간) 코네티컷주(州)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사진은 1998년 1월 22일 태국 수도 방콕에서 열린 미국상공회의소 주최 오찬에서 연설하는 모습./연합뉴스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별세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외교 정책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69~1977년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박정희 정부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시켰고, 당시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을 요청할 경우 수용하라고 주한 미국 대사관에 지시했다.

키신저는 하버드대 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1951년 6월, 휴전협상이 시작된 한국을 방문한 것이 첫 인연이었다고 지난 2010년 아산정책연구원 강연에서 회고했다. 한국 첫 방문 당시 미 육군의 의뢰로 미군이 한국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서를 쓰기 위해 의정부, 대구, 부산을 찾아갔다고 한다.

1974년 11월 제럴드 포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키신저는 국무장관으로서 동행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의 회담에 배석했다. 이후 공개된 외교문서를 보면 박 대통령은 미국 측에 북한 땅굴 문제를 설명하며 “땅굴을 찾기 위해 유정(油井) 시추 장비까지 쓰고 있다”고 하자, 키신저는 “원유를 찾을 수도 있겠다”며 유머로 받았다.

하지만 이듬해에는 한국 정부에 핵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한국의 핵개발이 북한과 일본 등 주변 국가에 영향을 주고, 소련과 중국의 대북 핵무기 지원을 보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키신저는 캐나다, 프랑스, 일본,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있는 오스트리아 등의 미국 대사관에도 한국의 핵무기 개발 저지를 위한 지침을 내렸고, 결국 핵개발을 무산시켰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당시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그의 신변 안전 보장을 요구하는 데 키신저가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이란 추측도 있지만 분명한 증거가 없다.

강대국 중심의 사고를 했던 키신저는 한반도 문제도 그 틀에서 바라봤다. 그는 1975년 유엔에서 중국과 소련이 한국을 승인하면, 미국과 일본도 북한을 승인하겠다는 ‘교차 승인’을 제안했다. 키신저는 2017년 8월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에서 “한반도 비핵화에는 미·중 합의가 필수 조건”이라며 미국과 중국이 북한 정권 붕괴와 주한미군 철수를 맞바꾸는 빅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