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무부에서 21년 간 일하며 대사까지 지낸 전직 미국 외교관이 쿠바를 위해 간첩 행위를 한 혐의로 체포·기소됐다. 그는 국무부에 입부한 첫 해부터 퇴직 후까지 약 40년 간 쿠바의 정보기관 총첩보국(DGI·Dirección de Inteligencia)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혐의를 받고 있다.
미국 법무부는 4일(현지 시각) 빅터 마누엘 로차(73) 전 주볼리비아 미국대사를 외국 정부의 요원으로 활동한 혐의로 체포해 기소했다고 밝혔다. 로차 전 대사는 1981년 11월부터 2002년 8월까지 국무부에서 일했으며 주볼리비아 미국대사를 지낸 후 퇴직했다. 퇴직 후 그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미국 남부사령부를 위해 자문역으로 일했다.
외교관으로 활동하는 동안 로차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쿠바를 포함한 중남미 담당 국장으로도 일했다. 그에 대한 혐의가 사실이라면 쿠바의 스파이가 백악관에 침투했던 셈이다. 메릭 갈런드 법무부 장관은 이번 사건에 대해 “외국 요원이 미국 정부의 가장 고위직까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침투한 사례 중 하나”라고 말했다.
◇ 본부(쿠바)서 ‘평범히 살라’ 지시해 ‘우익’ 행세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로차 전 대사가 쿠바 총첩보국의 스파이였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FBI는 사실을 확인하고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비밀수사관을 쿠바 총첩보국 마이애미 주재 요원으로 위장시켜 은퇴 후 플로리다주(州) 마이애미에서 살고 있던 로차에게 접근시켰다.
FBI 비밀수사관은 메신저 ‘왓츠앱'을 통해 로차에게 “대사님, 저는 미구엘이라고 합니다. 아바나(쿠바 수도 Havana)의 친구분께서 보낸 메시지를 갖고 있는데 민감한 사안입니다. 통화 가능하신가요?”라고 메세지를 보냈다. 로차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전화하셔도 좋습니다”라고 답했다.
로차와의 통화에서 FBI 수사관은 “연락해서 메시지를 드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칠레에서부터 우리를 많이 도와주신 것으로 안다. 직접 만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은 마이애미의 한 교회 앞에서 만났다. 로차는 교회로 이동하는 길에도 쿠바 총첩보국에서 교육 받은대로 우회로를 이용하고, 중간에 몇 분간 멈춰 미행하는 사람이 없는지 등을 살피며 이동했다고 미 법무부는 공소장에서 밝혔다.
FBI 비밀수사관은 자신을 쿠바 총첩보국의 마이애미 담당 요원이라고 소개했다. 점점 더 상대를 믿게 된 로차는 “돈 없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 누가 날 볼 가능성이 없다”며 한 푸드코트로 그를 데려갔다. 로차는 “칠레에서부터 (쿠바를) 도왔다”는 말을 듣고 FBI 수사관을 믿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국무부 근무 기간 동안 여러 중남미 국가에서 근무했지만, 칠레에서는 근무하지 않았다.
로차는 FBI 수사관에게 “칠레를 얘기하는 것을 보면 당신은 무슨 말을 들은 것이 틀림 없다. 그 말에 신뢰를 갖게 됐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 배신자가 있고 그들이 내가 칠레에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이라며 말을 흐렸다. 공소장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FBI는 로차가 과거 비밀리에 칠레를 방문해 쿠바 총첩보국과 관계를 형성했다는 정보를 갖고 그 점을 이용해 수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로차는 자신보다 훨씬 젊은 FBI 수사관이 “몇 년이나 (쿠바 스파이로) 일했나”라고 묻자 “약 40년”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많은 위험이 있었다”며 “당신처럼 젊은 사람을 보면 많은 긍지와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또 FBI 비밀수사관이 “아바나”라고 쿠바 수도를 언급하자, 로차는 “우리는 다른 이름을 쓴다. 우리는 절대 아바나라고 하지 않고 ‘그 섬'이라고 부른다”며 “나는 C(쿠바)나 H(아바나)를 말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우리를 배신해서 적(미국)의 방첩기관에 말한다면…”이라며 상대를 오히려 조심시켰다.
로차는 이 만남에서 내내 쿠바 총첩보국을 “본부(디렉시온)”라고, 미국을 “적”이라고 불렀다. 그는 2016~2017년쯤 도미니카 여권을 이용해 파나마에서 쿠바에 갔던 것이 쿠바 총첩보국과의 ‘마지막 접촉'이었다며 “이번에 연락해줘서 매우 고맙다는 것을 내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했다.
또 그는 “본부가 나에게 평범한 인생을 살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우익(right-wing) 인사로서의 인격(legend)을 창조했다”고 말했다. 스파이 세계에서 ‘레전드’는 주변을 속이기 위해 꾸며낸 신원이나 인격을 뜻한다.
◇ 미 정부 근무 기간 내내 “외국 요원 접촉한 적 없다” 거짓말
1950년 볼리비아에서 태어난 로차는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해 뉴욕에서 자랐다. 197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그는 예일, 하버드, 조지타운 등 명문대 학위를 바탕으로 1981년 미국 국무부에 입부했다.
지난 2월 쿠바 첩보요원을 가장한 FBI 비밀수사관이 로차를 만나 국무부에는 어떻게 들어갔는지 묻자 그는 “매우 섬세한 과정이었다”며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알았고, 본부도 함께 했다. 긴 과정이었고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무부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쿠바 총첩보국에 포섭돼 있었다는 뜻이다.
로차는 국무부 입부 후 줄곧 도미니카, 온두라스, 멕시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 중남미 국가의 정무를 다루는 업무를 했다. 1994년 7월부터 1995년 7월부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중남미 담당 국장을 지내며 쿠바 관련 특수 업무도 맡았다. 1995년 7월부터 1997년 7월까지는 쿠바 아바나의 스위스대사관 내에 개설된 미국 이익대표부의 부대표 역할도 했다.
이 기간 동안 로차는 미국 정부의 기밀 정보에 계속 접근할 수 있었다. 기밀 정보를 다루는 공무원들에게 요구되는 신원조사 설문지에서 로차는 항상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하거나, 외국 요원을 접촉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했다. 그리고 미국에 충성을 다짐했지만, 뒤로는 쿠바를 위해 일했다.
로차가 쿠바에 어떤 정보를 빼돌렸는지, 쿠바를 위해 어떤 임무를 수행해줬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2006~2012년 미군 남부사령부를 위해 자문 역할을 해주면서도 로차는 쿠바를 포함한 중남미 국가를 담당했다.
쿠바 총첩보국 요원을 가장한 FBI 비밀수사관은 올해 2월과 6월에 두 차례 로차를 더 만나 그가 쿠바 총첩보국을 위해 일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 6월 FBI 비밀수사관이 “(쿠바 총첩보국) 본부는 당신이 여전히 ‘동지'란 점을 확신하고 싶어한다. 아직도 우리 편이냐”고 묻자 로차는 “화가 난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내가 아직도 남자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국무부 외교보안수사국은 지난 1일 로차를 만나 임의 신문을 했다. 로차는 쿠바 총첩보국 요원을 만났다는 사실을 부인했고, 그 요원으로 가장했던 FBI 비밀수사관의 사진을 보여줘도 만난 사실을 거듭 부정했다.
로차와 FBI 비밀수사관이 마주 앉아 있는 사진을 제시하자, 그는 “이런 사람이 접근해 왔지만 한 번 뿐이었다”고 했다. 한 번 이상 만난 사실이 있지 않냐는 추궁에 로차는 더 이상의 진술을 거부했다. FBI는 끝까지 거짓말을 거듭하는 로차가 여전히 쿠바 스파이라고 규정하고, 그를 체포해 기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