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내년 대선에서 승리해 재집권할 경우 ‘북한 핵 동결’을 통해 대북(對北) 경제 제재 등을 완화하는 거래를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가 13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외교 치적’을 위해 비핵화 협상의 목표치를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에서 핵 동결로 낮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 트럼프 1기 때도 미·북간 협상을 앞두고 미 언론들에서 북핵 동결 및 제재 완화 가능성이 수차례 제기된 바 있다. 워싱턴 소식통은 “이런 구상은 북한이 기존 핵을 보유하도록 허용하는 방안”이라며 “트럼프가 비핵화 목표에서 후퇴한 것이 사실이라면 미·북간 어떤 합의가 나오든 한국의 안보를 크게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2019년 6월 30일 남북미 판문점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뉴스1

◇미·북 합의 ‘외교 치적’ 원하는 트럼프…“北, 핵 포기 안할 것’ 잠정 결론”

폴리티코는 이날 트럼프의 대북 구상에 대해 설명을 받은 소식통 세 명을 인용해 이 같이 보도했다.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새로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면 그에 대한 검증 수용을 요구하면서, 이에 대한 대가로 대북 제재를 완화하고 경제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비핵화’는 명시적으로 논의조차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폴리티코는 “트럼프는 북한의 핵무기를 해체하라고 김정은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을 수 있다”며 “핵무기 관련 대화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더 큰 일, 즉 중국과의 경쟁에 집중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트럼프는 비핵화를 아예 포기하는 것은 아니고 ‘장기 목표’로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이 매체는 전했다.

트럼프가 이런 구상을 검토하는 것은 그가 임기 초 북한과의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하기 때문이라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미의 오랜 대북 정책 기조에서 이탈하는 것”이라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한 익명의 소식통은 “트럼프는 (북한과의) ‘딜’을 원한다”며 “다만 어떤 종류의 거래를 원하는 지 그가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근본적인 북핵 위협 제거는 어려우니 핵 동결과 제재 완화 정도로 봉합한 뒤 ‘평화 달성’이라며 치적 내세우기에 집중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트럼프가 북한과의 협상을 다시 추진할 것”이란 관측이 지속적으로 나왔었다. 트럼프가 임기 초부터 ‘외교 업적 쌓기’를 위해 북한의 일부 핵 동결 절차 및 도발 중단을 대가로 제재 완화를 맞바꾸는 설익은 합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트럼프 측은 이날 폴리티코 보도를 부인했다. 트럼프 캠프의 스티븐 청 대변인은 “(폴리티코가 인용한) ‘소식통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며 “(그들은) 트럼프 전 대통령과 트럼프 캠페인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트럼프도 같은 날 ‘트루스 소셜’ 계정에 올린 글에서 폴리티코의 보도를 “가짜 뉴스”라고 밝혔다. 그는 “(언제나처럼) 익명 소식통들을 통해 북한 핵무기에 대한 내 관점이 완화됐다고 했는데, 이는 ‘지어낸 이야기’이자 허위정보이며, 잘못된 쪽으로 이끌고, 혼란을 초래하려는 민주당 공작원들의 소행”이라고 했다. 이어 “그 기사에서 단 하나 정확한 것은 내가 김정은과 잘 지낸다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 등 동맹국엔 ‘안보 재앙’, “사실상 북 ‘핵보유국’ 인정”

폴리티코가 이날 제시한 ‘북핵 동결 시나리오’는 북한이 현재와 미래의 핵 개발·생산은 중단하는 대신, 과거에 개발한 핵무기는 인정한다는 뜻이다. 북한은 플루토늄을 최소 70㎏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핵무기를 최대 18개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 또 다른 핵폭탄 재료인 고농축우라늄의 양은 이보다도 훨씬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랜드연구소와 아산정책연구원은 공동연구를 통해 북한이 핵무기를 해마다 12~18기씩을 추가 확보할 것으로 추정했다. 오는 2027년까지 151~242기의 핵무기를 보유할 것으로 추산했다.

폴리티코는 “트럼프가 대북 접근법을 완화한다면 한국과 일본 같은 동맹국들과, 북한에 대해 더 강경한 접근을 선호하는 공화당 인사들을 불안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지난 2019년 하노이에서 열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영변의 핵시설을 폐기하는 대가로 주요 대북 제재를 해제하는 방안을 막판까지 논의했으나 결국 회담장을 박차고 나왔었다. 그러나 미북 협상 과정에서 트럼프는 미 본토를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만 아니면 괜찮다는 식으로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도발을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 적이 있다. 그는 2019년 6월 김정은과의 판문점 회동 직후에도 최근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해 “다른 나라도 발사한다. 미사일 발사라고 보지 않는다”고 했었다.

워싱턴의 외교·안보 소식통은 “이 상태에서 미국이 ‘핵 동결’을 선언할 경우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며 “협상 과정에서 한국을 위협하는 단거리 미사일 도발 등은 뒷전이 되면서 한국만 북한의 ‘핵 인질’이 될 위험성이 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018년 19일 밤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경축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에 입장한 뒤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구상 한국 민주당 환영할 것…韓 핵무장 논의 다시 커질 수도”

복수의 워싱턴 소식통들은 “이날 보도된 ‘트럼프 대북 구상’은 한국의 민주당이 찬성해왔던 방안”이라며 “전임 문재인 정부가 ‘하노이 노딜’ 이후에도 미·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대화’에 목맸던 것처럼 한국 야당은 그의 구상에 환영할 것”이라고 했다.

폴리티코는 “트럼프의 구상은 아시아에서 핵보유 경쟁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한국 내부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자체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논의가 다시 거세질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이 북한의 기존 핵 보유에 문제 삼지 않을 경우, 북핵 대응 목적으로 한국이 핵무장을 검토하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한다는 미국 내 전문가들의 주장도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당시 백악관 출입기자였던 뉴욕타임스 매기 하버먼은 작년 출간한 회고록 ‘사기꾼(confidence man)’에서 “트럼프는 한국이 핵을 개발하는데 전향적인 것처럼 보였다”라고 했었다.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에 대한 재래식 방어 지원 등을 ‘경제적 부담’으로 인식하는 트럼프가 한국의 대북 방어를 한국이 주도하도록 하면서 핵 개발도 용인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