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11월5일)에 재도전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두 번째 경선지인 뉴햄프셔주(州)에서 워싱턴 정치인들과 지역 고위 관료 등 측근들이 대거 참여하는 유세를 갖고 ‘세과시’에 나섰다. 첫 경선인 아이오와주 코커스(caucus·당원 대회)에서 51% 득표율로 압승한 트럼프는 뉴햄프셔주에서도 승리해 ‘대세론’을 굳히겠다는 계획이다. 트럼프는 이곳에서 자신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에 대한 견제에 나섰고, 헤일리도 트럼프에 대한 공격 수위를 대폭 끌어올리면서 양측간 충돌이 본격화했다.
인구 130만명의 뉴햄프셔는 인구가 적어 전체 경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표심(票心)을 초기에 확인할 수 있어 ‘대선 풍향계’로 불려왔다. 당이 주관하는 코커스와 달리 주정부가 선거를 주관하는 프라이머리는 당원이 아니어도 유권자 자격만 갖추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중도·무당층도 투표가 가능한만큼 대선 표심을 코커스보다 더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평가다. 이 때문에 워싱턴 정가에선 “전국 민심을 가늠할 수 있는 사실상 첫 번째 선거”라는 말도 나온다.
◇'스포츠 경기’같은 트럼프 유세
뉴햄프셔주 프라이머리(예비경선·23일)를 3일 앞둔 20일 오후 7시30분, 뉴햄프셔 도심 맨체스터의 서던 뉴햄프셔대학(SNHU)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유세장에 트럼프가 등장하자 7000여명에 달하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일제히 자리에 일어서서 환호했다. 이날 유세장은 스포츠 경기를 연상시켰다. 지지자들은 스웨덴 출신 그룹 아바(ABBA)의 ‘댄싱퀸(Dancing Queen)’ 등의 노래를 따라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췄고, 트럼프의 발언마다 응원 구호를 외쳤다. 행사장 밖에선 맥주와 콜라, 치킨과 팝콘 등을 팔았다.
이날 오후부터 맨체스터 도심은 트럼프를 보기 위해 몰린 지지자들로 ‘마비’됐다. 유세 시작 3시간 전부터 입장 대기줄이 경기장 밖으로 200m 넘게 늘어섰다. 유세장 밖 곳곳에 트럼프의 얼굴과 그의 대선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 ‘바이든 탄핵’ 등이 적힌 티셔츠와 모자, 가방 등을 파는 천막 점포가 곳곳에 문을 열었다.
이날 행사엔 트럼프의 ‘친위대’들이 총출동했다.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2020년 대통령선거 개표 조작설을 퍼트렸다가 거액의 배상금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 신청을 한 무일푼 신세지만, 이날 유세장에서만큼은 ‘스타’였다. 그가 유세장에 등장하자 지지자들이 ‘루디’를 외치면서 환호했고, 수백명의 지지자들이 그에게 몰려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작년 10월 같은 당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 해임 사태를 주도했던 공화당 초강경파 맷 게이츠 하원의원도 유세에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 앞서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JD 밴스와 엘리스 스터파닉 뉴욕주 하원의원은 뉴햄프셔주 외곽에서 ‘대리 유세’에 나섰다. 미 언론들은 스터파닉이 트럼프의 부통령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고 이날 보도했다.
트럼프는 이날 1시간 30분간 이어진 연설에서 “부패한(crooked) 조 바이든은 역대 대통령 중 최악”이라며 “바이든이 집권하더니 중동에서 미사일이 날라다닌다. 세상이 불안해지고 있다”고 했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예멘의 후티 반군의 홍해 항행 선박 공격에 미국이 예멘 공습으로 응수하면서 중동 지역 긴장이 높아지는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
트럼프는 헤일리에 대해선 ‘RINO’(Republican In Name Only·허울만 공화당원)라며 “헤일리를 지지하는 상당수가 11월 대선때는 바이든을 찍으려는 성향의 민주당원이다. 공화당 대선 주자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라고 했다. 트럼프는 전날 유세에서도 “헤일리가 충분히 강하거나 똑똑하거나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그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북한 김정은 등과 상대할 수 없을 것”이라며 “이는 아마도 헤일리가 부통령으로 선택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미국 일부 매체는 트럼프가 헤일리를 부통령으로 지명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를 부인한 것이다. 이에 헤일리도 “나는 누구의 부통령도 되고 싶지 않다”고 맞받았다.
아메리칸리서치그룹이 12~15일 뉴햄프셔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보면 트럼프와 헤일리의 지지율은 각 40%로 동률이었다. 그러나 최근 나오는 여론조사들을 종합해보면 트럼프는 헤일리를 두 자리수 이상으로 앞서고 있다. 양측 모두 지지율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지지층을 결집하고 있지만, 여전히 트럼프가 큰 격차로 선두를 지키고 있다.
이날 유세에선 헨리 맥매스터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주지사와 파멜라 이벳 부지사도 참석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주하원의원과 주지사를 지냈던 헤일리를 겨냥한 것이다. 전날엔 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인 팀 스콧이 트럼프 유세에 참석해 지지연설을 했다.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사우스캐롤라이나 관료들이 뉴햄프셔 주민들의 표심을 흔들지 않을 걸 트럼프도 알고 있다”며 “이는 순전히 ‘정치적인 싸움’으로 헤일리의 기를 꺾어놓기 위한 차원”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이날도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를 언급하고 “그가 너무 ‘강하다(strong)’는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러나) 스트롱맨(철권 통치자)이 나라를 운영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했다. 최근 유세에서 푸틴이나 오르반, 김정은 등 독재 정권 수반에 대한 칭찬을 이어가고 있다. 이날 유세에서 한 참석자가 트럼프를 향해 ‘독재자’라고 소리쳐 연설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이에 트럼프는 “저런 말썽꾼들이 (진보 진영의 큰손) 조지 소로스로부터 돈을 받고 있다”고 응수했다.
◇'40%’ 무당파 표심 노리는 헤일리, 트럼프 비판 수위 올려
‘트럼프 대세론’을 뒤집기 위한 반전이 필요한 헤일리는 뉴햄프셔의 ‘무당파’ 공략에 적극 나섰다. 뉴햄프셔 주정부에 따르면 지금까지 올해 작년말 기준으로 대선에 유권자 등록을 마친 이들은 약 87만3000명이다. 이 중 공화당 지지자 27만명, 민주당 26만2000명으로 엇비슷한 반면 무당파는 34만명으로 39%를 차지한다. 이 때문에 무당파의 선택이 이번 선거 결과를 좌우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작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뉴햄프셔 주민 43%가 무당파였는데 이는 1988년의 33%보다 10%p 증가한 수준이다.
트럼프 유세에 앞서 헤일리는 이날 오후 3시 뉴햄프셔 도심에서 1시간 떨어진 린지에 있는 프랭클린피어스대에서 유세를 진행했다. 지역 대학을 고른 것도 고학력층의 ‘중도층’을 겨냥한 것이란 분석이다. 이날 유세가 열린 강당엔 지지자 200여명이 몰렸다. 행사는 이전처럼 각에 맞춘 듯 진행됐다. 헤일리의 연설은 차분했고 지지자들도 고성과 환호성 대신 박수로 화답했다. 유세장 뒷배경은 공화당을 상징하는 빨간색이 아닌 파란색 커튼이었다. 민주당원이었다가 이번에 헤일리를 지지하게 됐다는 56세의 탐 콜씨는 “민주당 유세장에 온 듯 하다”고 했다.
헤일리는 이날 유세에서 트럼프(77)의 ‘인지 능력’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는 작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고령 정치인에 대한 인지 능력 시험을 주장했었다. 헤일리는 이날 “어제 저녁 트럼프는 유세에서 여러 차례 내가 왜 1·6 의회 난입 사태를 막지 않았는지, 왜 사태 당시 더 잘 대응하지 못했는지 공격했다”며 “그러나 나는 그때 당시 워싱턴 DC에 있지도 않았고, 나는 공직에도 없었다”고 했다. “80대에 대통령이 되는 2명(트럼프와 바이든)과 대선을 치르고 싶느냐”고 했다. 트럼프는 전날 토론 행사 도중 헤일리를 당시 하원의장이었던 민주당 낸시 펠로시 전 의원과 여러 차례 혼동하고 “니키 헤일리가 (1·6 사태와 관련한) 모든 보안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헤일리는 의회 경력은 전무하다. 헤일리는 이어 “80대에 대통령이 되는 이들 2명(바이든과 트럼프)과 대선을 치르고 싶느냐”며 “어느 나이에 도달하게 되면 (인지 능력등이) 하락하기 마련”이라고도 했다.
이를 의식한 듯 트럼프는 이날 유세에서 “나는 (인지 능력이) 35살 정도 수준인 듯 하다. 사실 30년 전보다 지금이 더 나은 것 같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요? 지금은 기분이 더 좋고, 20년 전보다 인지 능력이 더 나은 것 같아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