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이용하는 나라들로부터 수천억 달러를 되찾아오겠습니다. 미국은 다시 위대해질 것입니다.”
지난 2011년 2월 미국 공화당의 최대 연례 행사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시팩)’ 연단에 처음으로 오른 도널드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리얼리티 TV 쇼 ‘어프렌티스’ 진행자였던 트럼프는 미 정치판에서 ‘초짜’였다. 공화당 유력 대선 후보였던 론 폴 전 하원의원,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주(州) 주지사,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 등에 영향력이 크게 밀렸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22일, 워싱턴DC 인근 메릴랜드주 게일로드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CPAC 현장은 ‘트럼프 제국’을 연상시켰다. 11월 미 대선을 8개월 쯤 앞둔 이날 행사장을 찾은 천 명이 넘는 지지자들과 연사들은 일제히 트럼프의 대선 선거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를 외쳤다. 미 언론들은 “아직 공화당 경선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트럼프를 공화당 대선 후보로 결정짓는 비공식 ‘대관식’ 같았다”고 했다.
이날 메인 행사장 ‘포토맥 볼룸’ 주변은 ‘트럼프 충성파’ 연방 상·하원 의원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몰려든 지지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미 국방부의 낙태 지원 정책에 대한 항의로 의회 인준이 필요한 수백명의 군 고위인사 승진 인준을 10개월간 지연시켰던 토미 터버빌 상원 의원, 공화당 내에서도 극단 성향으로 분류되는 의원 모임인 ‘프리덤 코커스(자유회)’의 초기 멤버 스콧 페리 하원의원, 부통령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바이런 도널즈 하원의원 등이 연단에 올라 “바이든 타도” “정권 교체”를 외쳤다. 마찬가지로 유력 부통령 후보인 엘리스 스테파닉 하원의원과, JD 밴스 상원의원도 다음날 연단에 오른다. 현장을 찾은 의회 관계자는 “트럼프를 향한 ‘충성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행사 마지막 날인 24일 오후 연설에 나선다.
CPAC은 행사 마지막 날 참가자들을 상대로 ‘트럼프의 부통령으로 누가 적합하느냐’는 주제로 비공식 여론조사를 진행한 뒤 그 결과를 발표한다고 했다. 매년 대통령 후보를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던 시팩이 특정 인사(트럼프)를 미리 대통령 후보로 정해놓고 부통령 후보 선호도를 조사하는 건 이례적이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공화당을 확실하게 장악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했다.
이날 오후 트럼프의 둘째 며느리인 라라 트럼프가 무대에 서자 지지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유명 의원이 연설할 때보다 반응이 더 뜨거웠다. 40대 킴 데이비스씨는 “트럼프 대통령과 더 가까운 사람이 더 힘이 센 것 아니냐”고 했다. 최근 트럼프는 대선 자금 등을 관리하는 공화당전국위원회(RNC) 의장직에 라라 트럼프를 앉히겠다고 했다. 최근 각종 재판 비용으로 선거 자금이 바닥날 위기에 처하자 당의 선거 자금에 대한 장악력을 키우려는 의도로 분석됐다.
반면 공화당 온건파나 트럼프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인사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때 CPAC 메인 행사에서 연설했던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리즈 체니 전 하원의원 등 중도 인사들은 초대 명단에서 제외됐다. 트럼프와 아직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와 지난달 후보직을 사퇴한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등은 초대받았지만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작년 CPAC 행사 연설에 나섰던 헤일리는 ‘강성 공화당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지지자들의 야유를 받았었다.
이에 반(反)트럼프 인사들은 23일 CPAC 행사장에서 15㎞ 쯤 떨어진 워싱턴DC의 한 호텔에서 트럼프 1인 독주를 견제하는 ‘맞불 행사’를 개최한다. 트럼프 탄핵에 찬성했다가 살해 협박을 받은 애덤 킨징어 전 하원의원, 1·6 의사당 난입 사태 당시 트럼프가 ‘폭력 사태’ 경고를 무시했다고 청문회에서 증언했던 캐시디 허친슨 전 백악관 보좌관 등 10여 명이 참석한다. 주최 측은 “(트럼프 열풍에 맞서) 미국의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을 보존하는 방안 등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했다.
오는 24일 공화당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州)에서 프라이머리(예비선거)를 연다. 지난 세 차례 공화당 경선에서 연패한 헤일리는 자신이 주지사·하원의원을 지냈던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도 트럼프에게 밀리고 있다. 그러나 헤일리는 “중도 사퇴는 없다”며 경선 완주 의지를 거듭 밝히고 있다. CNN 등은 “(헤일리가) 각종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 트럼프의 향후 유죄 판결 가능성 등을 기대하고 중도층을 포섭하는 데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