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세계 경찰’ 노릇해서 얻은 게 뭡니까? 난 세계 시민이 아니라 미국 시민입니다.”
21일 오후 미 워싱턴DC 인근 메릴랜드주(州) 게일로드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시팩)’ 행사장 한편에서 한 보수 논객이 이렇게 외치자, 수백 명이 환호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선거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가 적힌 팻말을 든 지지자들 일부는 성난 표정으로 “우크라이나가 미국과 무슨 관계냐” “경제나 신경 쓰라”고 소리쳤다.
미 공화당의 최대 연례 행사인 CPAC이 이날 나흘간 일정으로 막을 올렸다. 11월 미 대선을 8개월여 앞두고 열린 올해 CPAC의 최대 화두는 전 세계 보수 진영에서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고립주의’다. 이날 연사들은 잇따라 “이제 미국은 대외 이슈에서 손을 떼고 국내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고, 지지자들은 열광했다. 외국 문제에 적극 개입하고 글로벌 무대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확장해야 한다는 예전 공화당의 ‘개입주의’ 주장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행사장을 찾은 정치권 관계자들은 “트럼프의 ‘아메리칸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기조를 앞세운 공화당 내 고립주의 세력이 새로운 주류로 떠올랐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엔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아랍과 이스라엘 간 분쟁도 없었습니다. 미국이 (불필요하게) 개입할 일이 없었다는 겁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주독 미국대사, 국가정보국(DNI) 국장 대행 등을 지낸 트럼프 측근 리처드 그레넬이 이렇게 말하자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CPAC은 이날 첫 공식 행사로 ‘반(反)세계주의’를 주제로 한 ‘첫 국제 서밋(Inaugural International Summit)’을 개최했다.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등 트럼프 측근들과 함께 아르헨티나 하비에르 밀레이 행정부의 패트리샤 불리치 안보 장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이끌었던 극우 정당 영국독립당의 나이절 패라지 전 대표, 45일의 ‘최단명’ 총리인 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 헝가리 오르반 빅토르 정권의 터카츠 사볼츠 주미 헝가리 대사 등 각국의 보수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날 연사들은 국적은 달랐지만 반이민, 반세계화 등에 같은 목소리를 냈다. 패라지 전 대표가 “급진적 이슬람이 영국에 밀고 들어오더니 이젠 영국 정치의 주류가 되고 있어 염려스럽다”고 하자 한 공화당 지지자는 “우리(미국) 남부 국경도 무방비로 뚫리고 있다”고 소리쳤다. 이에 패라지는 “국경을 통제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국가가 될 수 없다”며 “미국 국민들이 국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대통령(트럼프)을 선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오르반 총리가 장기 집권 중인 헝가리의 터카츠 대사는 뒤이어 “(강경 이민 정책으로) 요새 헝가리엔 불법 이민자가 0명”이라며 “국경 장벽을 세우겠다는 미국의 계획을 지지한다”고 했다.
트럼프의 ‘책사’로 불리며 경제적 국수주의, 고립주의 운동을 주도해온 배넌 전 수석전략가가 “세계화의 과실을 독점한 ‘글로벌리스트(globalist·세계주의자)’들은 우리의 실존적 위협”이라고 하자 지지자들이 환호했다. 트럼프는 그간 민주당 정치인, 금융인, 관료 등 해외 문제에 개입을 주장하는 엘리트층을 ‘글로벌리스트’라고 부르며 비판해왔다. 미 보수 진영 핵심 연구소인 헤리티지재단을 중심으로 트럼프 재집권을 내다보고 정책 과제를 정리한 900쪽 분량의 보고서 ‘프로젝트 2025′에서도 ‘유엔이나 유럽연합 같은 초국가적 조직을 열렬히 지지하는 글로벌리스트’를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이날 행사는 공화당이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 등을 놓고 찬반으로 갈려 극심한 내분을 겪는 가운데 열렸다. 하원의 친트럼프 성향 강성 의원들이 우크라 지원안에 반대하는 반면,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공화당 상원 중진 의원 상당수는 여전히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트럼프는 매코널 등에 대해 노골적으로 ‘퇴출’ 경고를 해왔다. 한 CPAC 관계자는 “언제까지 그런 사람(매코널)들이 당을 주도할 수 있을 것 같느냐”고도 했다.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3일 “트럼프나 오르반 등은 ‘국가주의적 보수주의(national conservatism)’를 급속도로 퍼뜨리고 있다”며 “독일·프랑스 등 주요 국가에서도 이들 세력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대체로 다문화주의 등 다원주의를 경멸하고 이민에 적대적이며, 현재 자유시장이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조작되고 있다고 의심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넌은 이날 행사에서 이코노미스트지를 들어보이며 “역시 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리스트 세력의 얼빠진 소리를 대변하고 있다”며 “그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무조건 혐오한다”고 했다.
☞고립주의(isolationism)
자국 이익이나 안보와 직접 관련이 없는 타국의 갈등이나 문제에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외교 정책 기조. 1796년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이 고별 연설에서 “미국은 유럽의 분쟁에 휘말려선 안 된다”고 말한 데서 시작했고, 제임스 먼로 대통령 때 나온 ‘먼로 독트린(1823년)’을 통해 공식화했다. 미국의 국력이 크게 강화된 20세기부터는 주요 국제 문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개입주의(interventionism)’가 부상했지만 잇따른 전쟁 개입으로 인한 국제사회의 반발, 고물가·경제난 등이 이어지자 ‘미국 문제에만 신경 쓰자’는 고립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 기조와 일맥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