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해고야(You’re fired).”
23일 오후 4시30분 미국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주(州) 주도 컬럼비아에서 1시간 떨어진 록힐의 대형 실내 경기장. 오는 11월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유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렇게 말하자 관중석을 꽉 채운 6000여명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이 문구는 트럼프가 정치판에 들어오기 전인 20여년 전 자주 쓰던 표현이었다. 유명 TV프로그램 ‘어프렌티스’를 진행하면서 출연자들에게 이 말을 즐겨 써 그를 상징하는 ‘유행어’가 됐다. 그러나 이날은 공격 대상이 민주당 소속 조 바이든이었다. 이날 유세장 곳곳에서 지지자들은 ‘Fire Biden(대통령 바이든을 해고하라)’는 팻말을 들고 있었다. 다음날인 24일 공화당은 이 곳에서 다섯 번째 경선(프라이머리·예비선거)을 연다.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는 여전히 트럼프와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지지자들은 이미 트럼프와 바이든과의 ‘리턴매치(재대결)’을 당연한 듯 여기면서 ‘바이든 타도’를 외쳤다.
◇수천명 대기 줄만 600m…트럼프 “이런 분위기 본 적 없어, 오늘 선거해야”
이날 트럼프 유세는 지난달 진행된 어떤 행사보다도 분위기가 고조됐다. 행사 시작 3시간 전부터 유세가 진행되는 경기장에 들어가기 위해 선 지지자들 줄이 600m에 달했다. 한 지지자는 “역시 (보수 성향의 지지세가 강한) ‘딥 사우스(Deep South·인종 차별이 심했던 남부 주들)’ 지역 답다”고 했다. 경기장에는 장갑차와 경찰차가 곳곳에 배치됐고 건물 위엔 소총 등 중무장을 한 군인들이 망원경을 들고 주위를 살폈다.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트럼프는 비밀경호국(SS) 등의 경호를 받고 있다.
행사 몇 시간부터 줄을 선 40대 마이크 로저씨는 “더 빨리 왔어야 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올 줄 몰랐다”며 “트럼프 유세장에 오는 사람들은 시끄러운 사람들(louder ones)일 줄 알았는데 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 놀랍다”고 했다. 흑인 지지자인 마운트 번스(35)씨는 “민주당이나 바이든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이렇게 클 지 몰랐다”고 했다.
이날 1시간 30분 정도 이어진 연설 내내 트럼프는 여유로웠다. 트럼프는 “놀랍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을지 몰랐다”며 “내일 투표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11월 5일(대선)이다. 가장 슬픈 건 대선이 9개월이나 남아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시간이 이대로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자”고도 했다. 경선은 이미 끝났고 바이든과의 대선 대결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헤일리를 30%포인트 넘게 따돌리고 있다. 공화당 내에서 트럼프의 전국 지지도는 77% 가까이 올라갔다.
그간 경선 유세에서 헤일리, 이미 사퇴한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등 주로 당내 경쟁자들에 대한 공격에 집중했던 트럼프는 이날 ‘바이든 때리기’에 집중했다. 트럼프는 “바이든 정권 하에서 미국인 가정은 3년 연속 침체를 겪었다. 엄청나게 뛴 인플레이션을 보라 그의 멍청한 에너지 정책 등으로 당신은 열심히 벌었더라도 결국 뒤쳐지게 됐다”고 하자 지지자들이 환호했다.
트럼프는 “바이든이 자기 집권 중 주가가 올랐다고 자랑하길 좋아한다”면서도 “주식 시장이 소폭오르긴 했지만,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소폭 상승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어 “기름값을 보라. 캘리포니아 일부 지역에선 기름값이 갤런(약 3.78ℓ)당 7달러까지 올랐다. 이는 바이드노믹스(바이든 정부 경제 정책) 때문”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2기엔 ‘아메리칸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더욱 강한 수준의 보호무역 정책을 펴겠다고도 했다. 그는 “미국은 다시 트럼프 행정부 아래서 다시 한번 최대 수준의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하이어 아메리칸(Hire American)’ 아래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재임 당시 한국과 중국 등 수입산 철강에 25%의 관세를 부과했던 것을 언급하고 “외국에 대한 관세가 올라가면 미국 가정과 근로자의 소득이 올라가게 된다”고 했다.
여전히 당내 경쟁을 벌이고 있는 헤일리에 대한 견제도 잊지 않았다. 트럼프는 “헤일리는 민주당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에게 자금을 받고 있다는 소리”라며 “누가 공화당 예비 선거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의 표를 원하나. 그게 도대체 뭔가”라고 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억만장자 기업인인 ‘링크드인’ 공동 창업자 리드 호프먼이 작년 말 헤일리 선거운동을 돕는 수퍼팩(미 선거 정치자금 단체)에 25만달러(약 3억3000만원)를 기부한 사실 등을 두고 헤일리는 “공화당 후보가 아니다”라며 정체성 공격에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내일(경선 당일) 헤일리는 아주 나쁜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헤일리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주지사와 하원의원 등을 지냈다. 그러나 이날 많은 지지자들은 “우리가 헤일리를 잘못봤다. 헤일리는 공화당원이 아닌 ‘배신자’”라고 했다. 중도 성향의 지지자들에게 구애하고 있는 헤일리를 강성 지지자들은 이미 ‘손절’한 지 오래였다.
◇트럼프 “체외 수정 지지”...‘낙태 논란’ 의식한 듯
트럼프는 이날 앨라배마주에서 냉동 배아도 ‘사람’이라고 인정한 판결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난 소중한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커플들이 IVF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했다. 트럼프가 최근 ‘임신 16주 이후 낙태금지’에 찬성한 것으로 알려지자, 민주당 진영이 이에 대해 공세를 펼치며 쟁점화에 나서는 상황을 진화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됐다.
그는 이날 “우리는 엄마와 아빠들이 아기를 갖는 것을 더 쉽게 만들고 싶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며 “여기에는 미국의 모든 주에서 IVF(체외 인공수정) 같은 난임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포함된다”고 했다. “오늘 난 앨라배마주 의회가 앨라배마에서 IVF를 계속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즉각적인 해법을 신속히 찾을 것을 촉구한다”고도 했다.
앞서 앨라배마주 대법원은 지난 16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냉동 배아도 어린이이며 이를 폐기할 경우 부당한 사망에 따른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여성의 난자를 채취해 시험관에서 수정한 뒤 이렇게 만든 배아를 다시 자궁에 이식하는 IVF 시술을 앨라배마에서 계속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 판결에 여성의 낙태할 권리 등 생식권을 옹호하는 민주당 성향 단체들은 판결에 즉각 반발했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날 “공화당은 항상 생명의 기적, 그리고 엄마와 아빠, 그들의 아름다운 아기들 편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우리 위대한 공화당은 인생 최고의 기쁨을 얻고자 하는 당신과 늘 함께하겠다”고도 했다. 낙태 문제에는 강경했던 공화당으로서는 트럼프의 이날 발언이 의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2022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낙태 문제로 패배한 경험이 있는 만큼, 트럼프가 이탈표를 방지하기 위해 ‘체외 수정 지지’ 입장을 분명히 했다는 분석이다.
◇여론조사 트럼프에게 30%포인트 뒤져…마지막 경선되나
이번 경선은 헤일리의 경선 완주 여부를 판가름할 승부처로 꼽힌다. 지난 세 차례(아이오와·뉴햄프셔·네바다주) 공화당 경선에서 연패한 헤일리는 자신이 주지사·하원의원을 지냈던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도 트럼프에게 밀리고 있다. 정치분석사이트 파이브서티에이트(538·미국 대통령 선거인단 수를 의미)가 이날 기준 공화당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 여론조사를 평균한 결과, 트럼프 전 대통령은 63.6%의 지지율로 헤일리 전 대사(33.1%)를 30.5%포인트 앞서고 있다.
트럼프 대선 캠프는 최근 ‘니키 헤일리에게 끝은 가까이 왔다’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자신의 임박한 정치적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통곡하는 패배자”라고 했다. 얼른 경선 레이스에서 사퇴하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헤일리는 계속해서 “사퇴는 없다”고 하고 있다. 미 언론과 정가에선 각종 사법 리스크에 휩싸인 트럼프 전 대통령이 유죄 판결 등으로 대선 출마를 못 하는 만일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버티기 작전’에 나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월가 및 거대 기업 큰손의 후원을 받아 선거 자금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상황도 헤일리가 경선에서 계속 남아있을 수 있는 동력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사우스캐롤라이나는 헤일리의 선거 캠페인의 마지막 무대가 될 수 있다”며 “(이번 선거 결과를 통해) 최근 여론조사를 넘어서는 결과를 보여줄 경우 수퍼 화요일까지 동력을 이어갈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향후 여정이 험난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번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가 끝나면 민주당과 공화당은 이후 오는 27일 미시간에서 동시에 프라이머리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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