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시에서 가장 가난한 자치구인 브롱스(Bronx)구에 위치한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이 억만장자 남편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아내로부터 10억 달러(약 1조334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 받아, 모든 의대 재학생의 학비를 ‘영원히’ 면제하기로 했다고 26일 발표했다. 이 의과대학의 야론 요머 학장은 “학교를 완전히 바꿀 이 선물로 인해, 우리의 교육 사명에 전념하는 많은 학생들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0억 달러를 이 의과대학에 기부한 사람은 1968년부터 이 학교에서 학습장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ㆍ심리학자로 일했던 루스 갓츠먼(Ruth Gottesman) 여사. 2022년 10월 96세로 숨진 그의 남편 데이비드 ‘샌디’ 갓츠먼은 세계적인 투자가 워런 버핏의 지인으로, 월가에서 유명한 투자사를 설립하고 버핏이 세운 다국적 투자기업인 버크셔 해서웨이에 초기 투자했다고 한다.
갓츠먼 여사는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남편은 숨질 때에 해서웨이 주식으로 구성된 거대한 포트폴리오를 아내에게 남겼고 “어디든 당신이 좋다고 생각되는 곳에 이 돈을 쓰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뉴욕 주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비위생적인 곳에 위치한 의과대학
10억 달러 기부금은 미국의 억만장자 부호들이 종종 미국 대학에 기부하는 장학금으로도 가장 많은 축에 속하며, 단일 의과대학에 제공된 것으로는 최대 규모다. 최근에는 2018년 11월, 945억 달러의 재산(포브스 집계)으로 세계 7위 부호로 꼽힌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이 자신의 모교 존스 홉킨스대에 18억 달러를 기부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 기부가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은 억만장자들은 대개 유명 대학에 기부하는데 반해,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은 뉴욕시 5개 자치구 중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브롱스는 또 뉴욕시가 속한 뉴욕 주 전체의 62개 카운티 중에서도 성인 흡연율(17%)ㆍ성인 비만(32%)ㆍ10대 임신(1000명 당 22명)ㆍ조기 사망ㆍ폭음ㆍ성병 감염 등의 지수에서 가장 건강에 해로운(unhealthiest) 지역으로 꼽힌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대는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가 매년 집계하는 미국 내 의과대학 랭킹에서 연구 부문 42위로, 미국 내에서 잘 알려진 학교다. 800명 가까운 재학생의 50%는 뉴욕시 출신이고, 60%가 여성이다. 또 백인이 48%, 아시아계 29%, 히스패닉 11%, 흑인 5%다. 그러나 연간 학비가 5만9000 달러에 가까워, 많은 학생이 졸업 무렵에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된다.
학교 측은 갓츠먼 여사의 10억 달러 장학금으로 “마지막 학년 재학생은 2024년 봄학기 학비가 환불되며, 새학년도가 시작하는 8월부터는 모든 신입생과 재학생 학비가 무료”라고 밝혔다.
◇ “남편도 행복해 할 것”
갓츠먼 여사는 처음엔 남편이 남긴 10억 달러를 어디 ‘좋은 목적’에 쓸지 생각하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NYT에 말했다. 그러나 자녀들이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말라”고 권유했다.
갓츠먼 여사가 생각해낸 것은 의과대학 학생들이 무료로 공부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었다. 10억 달러면,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대 학생들이 영원히 무료로 공부할 수 있게 할 충분한 돈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을 인터뷰한 결과, 재학생의 거의 절반이 졸업할 무렵엔 20만 달러가 넘는 빚을 안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갓츠먼 여사는 “아인슈타인 의대가 키워낸 의사들이 브롱스 지역과 전세계에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이 거액을 남겨준 남편이 매우 고맙고, 이 가치 있는 대의(大義)를 위해 이런 선물을 제공하는 특권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도 복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갓츠먼은 “가끔 남편 ‘샌디’가 이 기부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기는 하다”고, NYT에 말했다. 그는 “남편이 찡그리지 않고 웃기를 바란다. 남편은 내게 이런 일을 할 기회를 줬고, 남편도 행복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목숨을 구해 준 사자에게, 생쥐가 은혜를 갚을 차례”
갓츠먼의 10억 달러 기부 결정에는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대와 대학 병원을 총괄하는 CEO인 나이지리아 출신의 소아과 전문의(專門醫) 필립 오주아(Ozuah)와의 교분도 크게 작용했다.
갓츠먼과 오주아는 2020년 초 플로리다주 웨스트 팜비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란히 앉아서 어린 시절과, 아동들과 가정을 돕는 학문에 전공하게 된 서로의 배경을 나눴다고 한다. 두 사람이 처음 알게 된 계기가 됐다. 오주아는 공항 도착 후에도 걸음이 불편한 갓츠먼 여사를 옆에서 부축했다. 갓츠먼은 헤어지면서 오주아에게 “당신 걸음이나 조심하라”며 감사를 표했다.
이후 갓츠먼 부부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을 때, 오주아는 즉시 이 대학병원의 앰뷸런스를 보냈고, 이후 가택 격리된 부부를 3주 동안 매일 보호복을 입고 방문해서 한 시간씩 얘기를 나눴다.
갓츠먼 여사는 당시 오주아에게 생쥐의 목숨을 살려준 사자에게 생쥐가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우화(偶話)를 들려줬다. 우화에선 사자가 생쥐의 말에 거만하게 웃었지만, CEO 오주아는 ‘하하하’ 웃지 않았다고 한다.
갓츠먼은 대학 CEO 오주아를 작년 12월에 다시 만나, ‘큰 선물’을 주고 싶다고 했다. 갓츠먼 여사는 오주아에게 ‘사자와 생쥐’ 얘기를 기억하느냐며, “이제 생쥐 차례”라고 말했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학교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선물을 준다면, 뭘 하겠소”라고 갓츠먼이 물었다. 오주아는 “세 가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하나는 교육비가 무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갓츠먼은 “그간 내가 원하는 바”라고 했다. 오주아는 나머지 2개는 대지 못했다.
◇10억 달러 기부하지만, 대학 이름은 그대로
하지만, 갓츠먼 여사는 10억 달러 기부금과 관련해,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오주아는 “어떠한 인정이나 치장없이 그저 타인의 복지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이 있다는 차원에서 이름을 밝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기부를 장려하는 효과가 있다”고 갓츠먼을 설득했다.
갓츠먼은 자신의 이름이 의과대학 이름에 들어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예를 들어, 코넬대 의과대학은 2013년 당시 뉴욕의 금융가였던 시티그룹 CEO 샌퍼드 웨일로부터 1억5000만 달러를 기부받고, ‘웨일 코넬 의대’로 이름을 수정했다.
그러나 갓츠먼은 이 브롱스의 의과대학에 자신이나 남편의 이름이 붙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였던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1955년 이 의과대학이 개교했을 때에, 자기 이름을 붙이는 것에 동의했다.
갓츠먼 여사는 “우리는 이토록 대단한 이름 앨버트 아인슈타인을 가졌는데”라며 “그 이름은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