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스포트(MS) 창업 멤버인 스티브 발머(Ballmerㆍ67)는 3월 현재 블룸버그 억만장자 인덱스에서 세계 6위의 부호에 올라 있다. 재산은 1430억 달러(약 189조5622억 원). 같은 달, 포브스는 그의 재산을 1254억 달러로 평가해, 세계 8위 부호에 올려놓았다.

미 프로농구팀 로스엔젤레스 클리퍼스를 2014년 20억 달러에 사들인 구단주 스티브 발머(오른쪽)의 2022년 11월 모습/USA TODAY Sports 연합뉴스

발머는 2000~2014년 MS의 대표이사(CEO)를 지냈고, 현재는 미 프로농구팀 로스엔젤레스 클리퍼스(Clippers)의 구단주다. MS의 지분 4%를 갖고 있어, 올해 주식 배당금만 1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글로벌 부호의 아들로 자라나고 사는 삶은 어떨까.

발머의 세 아들 중 둘째인 피트 발머(29)는 19일 미국의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절대 돈을 허투루 쓰지 못하게 했던 부모님과 그 자신의 검약한 생활을 소개했다.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피트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전업(專業)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이 뉴스 매체에 말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피트 발머. 그는 자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다른 중상층 집안 부모들이 주는 것보다 더 비싸지는 않았다고 말했다./인스타그램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우리집이 부자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세계적ㆍ역사적인 부자인 줄은 몰랐다. 나도 아버지가 MS의 ‘빅 가이(big guy)’라는 건 알았다.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는 사장이었고, 아홉 살 때 CEO가 됐으니까.

친구들은 우리 집 욕실 수를 물었고(여섯 개였다), “엄마는 벤츠를 모느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우리 엄마 차는 포드 퓨전(Fusion)인데”였다(퓨전은 2만5000~3만5000달러 대의 중형 세단으로, 2020년에 단종됐다.)

부모님은 기본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라면 사 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불필요한 낭비는 매우 싫어했다. 4학년 때 라크로스(lacrosse)를 처음 배우면서, 멋진 스틱을 사달라고 했다. 엄마 대답은 “너는 이제 시작했으니, 그런 게 필요 없어”였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사립 기숙학교에 다니던 다른 중상층 애들의 것보다 더 비싸지 않았다. 한 해에는 닌텐도 게임보이(휴대용ㆍ100달러 미만)을 받았고, 한 해에는 역기와 벤치 프레스를 사 달라고 했다.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말만 해라, 돈 줄께”라고 한 적이 없었다. 우리 형제도 옷이나 자동차에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아버지가 몰던 1998년형 링컨 타운카를 몰았고, 나는 동네에서 카풀(carpool)을 하면서 멕시코음식 체인인 치포틀레(Chipotle) 선물권을 받아 엄청 먹었다.

중산층 집안에서 자란 아빠와 오리건 주의 농장 집 딸인 엄마에게, 막대한 돈과 육아(育兒)는 모두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신들을 키운 방식으로 우리를 키웠다. 자라면서 부모에게 돈 얘기를 듣지 않았을테니, 우리에게도 돈 얘기는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요즘 부잣집 애들은 지나치다. 우리는 그런 거 안 좋아한다”는 식이었다.

나도 돈더미에 파묻혀 살지도 않고, 응석받이로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부감을 갖는다. 초등학교 용돈은 1주일에 10달러였는데, 사실 그 돈도 거의 쓸 곳이 없었다. 나는 절반 이상 엄마에게서 용돈 받는 것을 까먹었다.

중학생이 되고는 더 비싼 것들을 갖고 싶어졌다. 예를 들면, 새 휴대폰 ‘팜 프리(Palm Pre)’였다(2009년 이 휴대폰의 가격은 200달러였다). 부모님은 내 돈으로 휴대폰을 사면, 통신료는 지불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집 근처 골프 클럽에서 캐디로 일하면서 그 돈을 벌었다.

물론 부모님이 내 대학 학비와 방값을 대줬다. 엄청난 돈이었다. 대신 나는 고교ㆍ대학 시절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모든 생활비를 벌었다. 인턴 자리 얻는 데 아버지의 도움은 전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친구들과 해외 여행을 가기로 하고, 부모님에게 1000달러를 빌렸다. 그러나 그 돈으로는 부족했다. 룸메이트에게 1000달러를 더 빌렸다. 부모님에게 다시 가서 손을 벌리기 싫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무책임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게임 개발사에서 제품 관리자로 일하던 스물다섯 살에, 할아버지의 유산을 처음 받았다. 할아버지는 포드 자동차에서 중간관리층까지 지낸 분이었는데, 모은 돈으로 마이크로소프트사 주식을 샀고, 이게 내가 유산으로 받을 때엔 수십만 달러가 됐다.

할아버지 ‘유산’ 얘기를 처음 들은 것은 대학교 2학년이었다. 첫 반응은 ‘안 받겠다’였다. 나는 우리 집안의 막대한 부(富)가 불편했고, 또 ‘내가 잘 나가는 테크 회사에 취업하면 집안 돈은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 처음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했을 때에도, 내 무대 이름은 ‘피트 브론슨’이었다. ‘발머’란 이름과 엮이기 싫었다.

그러나 스물다섯 살이 됐을 때, 할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매우 멍청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게임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코미디언으로 일하고 있는데, 그 유산이 있고 코미디 수입이 있어서 내 재산 상태는 상당히 안정적이니까.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클럽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는 피트 발머/인스타그램

나는 1주일에 다섯 번 코미디 클럽에 고정 출연하고, 한두 군데에선 방청객과 함께 마이크를 공유하는 오픈 마이크(open mic) 쇼를 한다. 또 코미디 쇼도 제작한다.

내 재산이 ‘안정적’인 데에는 나의 돈 사용 원칙도 한몫을 한다. 나는 비싼 옷이나 국내선 항공기 1등석같이 수백 달러대의 물품은 구매하지 않는다. 최근에 내가 산 재킷은 120달러 정도였다.

지금 내가 타는 차는 2015년 포드 포커스다(당시 신형이 1만9000~2만4000달러였던 소형 해치백). 원래 동생이 타던 차다. 동생이 고교 시절 타던 아버지의 1998년형 링컨 타운카가 결국 폐차되면서, 아버지가 애초 그에게 사줬다.

나는 사람들이 내 차를 보고, ‘돈 좀 있네’라고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매월 신용카드 이용 명세목록을 보면서, ‘이게 정말 내가 구입해야 했던 것인가’ 늘 검토한다.

우리 삼형제는 단 한 번도 부모님에게 상당한 금액을 원한 적이 없다. 부모님도 한 번도 우리에게 그런 금액을 준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그런 돈을 요구한다는 게 좀 역겹고 한심하다.

부잣집에 태어난 것과 관련해,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하나는, 나처럼 이를 밝히길 꺼리고 그 사실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다. 이는 나에 대해 매우 큰, 어느 한 부분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것이니까 ‘부정직하다’는 비판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게 ‘부정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어느 개인이든, 집안의 돈보다 훨씬 복잡한 여러 면(面)을 지니고 있으니까. 전에 사귀었던 한 여성은 나중에 “사실 아빠가 MS의 CEO”라고 말했더니, “그럼 다른 인생 길을 걸어야지”라며 나를 떠났다. 나는 내가 돈 걱정 없는 아티스트 부류로 보이는 게 싫고,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나의 진실성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초(超)부유층 집안 애들의 또 다른 부류는 부를 자랑하고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펑펑 돈을 쓰는 타입이다. 돈자랑을 하고, 다 커서도 레인지 로버를 사달라고 부모에게 조른다.

나는 그런 접근을 좋아하지 않고, , 스스로를 증명해서 돈과 관계없이 자신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 가족도 좀 더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돈 얘기를 꺼낼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 아버지가 소유한 프로농구팀 ‘클리퍼스’는 어떻게 될지, 어떻게 하면 돈이 우리를 오염시키지 않을지, 유언장에는 어떤 내용을 적을지…

분명히 돈은 한 사람에게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다. 나도 더 멋진 것들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쾌락에 적응하지 않으려고 경계한다. 나도 아마 ‘새로운’ 기본 생활방식에 적응해, 더 풍족한 삶이 주는 미끄러운 비탈길로 빠져들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