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관용 정책을 앞장서 시행했던 미국의 ‘진보 도시’들이 치솟는 강력 범죄로 여론이 들끓자 강경 정책으로 돌아서고 있다. 수도 워싱턴 DC와 캘리포니아주(州) 샌프란시스코 등 민주당 성향이 강한 도시들은 수년간 범죄 형량을 낮추고, 경찰의 대응 권한을 약화하는 범죄 관용 정책을 시행해왔다. 그러나 강도·살인·성범죄 등 강력 범죄가 급증하자 이들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치안 불안을 호소하는 주민들의 항의가 거세지면서 뒤늦게 정책 실패를 인정하고 공권력을 다시 강화하기 시작했다. 워싱턴 정가에선 11월 미 대선을 앞두고 진보 진영의 이 같은 태도 변화를 정치 쟁점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지난 7일 주민 투표를 통해 범죄 단속을 강화하는 법안을 의결했다. 먼저 노숙자 등 복지 수급자에 대한 마약 검사를 의무화했다. 이들이 시에서 생계비 명목으로 지원받은 돈으로 마약을 구매·투약하는 악순환을 끊겠다는 의도다. 또 경찰이 범죄 단속을 위해 거리에 방범 카메라를 설치하거나 드론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경찰의 범죄 차량 추격을 어렵게 했던 관련 규정도 대폭 완화했다. 워싱턴 DC 의회도 지난 6일 총기 범죄 처벌을 강화하고, 조직적인 소매점 절도에 대한 별도 처벌 규정을 신설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같은 날 뉴욕주도 지하철 강력 범죄를 뿌리 뽑기 위해 지하철에 주 방위군 750명과 주 경찰 250명을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또 지하철역 이용객들의 가방을 무작위로 검사하기 시작했다.
범죄 관용을 상징하는 대표적 지역들이 일제히 강경 정책으로 돌아서자, 미 언론들은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미 공영 라디오 NPR은 “(범죄가 급증해) 화들짝 놀란 진보 성향 도시들이 지난 몇 십년간 자신들이 비판해왔던 보수 진영의 ‘범죄와의 전쟁’을 수용하고 있다”고 했다. 미 일간 LA타임스는 “예상하지 못한 우향우(右向右)”라고 전했다.
2020년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해 여론이 들끓자 워싱턴 DC, 샌프란시스코 등은 경찰 권한을 축소하고 경찰 예산을 깎았다. “유색인종이 미국의 불평등한 사법 체계 때문에 과도하게 경찰 단속을 받고 죄질에 비해 무거운 형벌을 받고 있다” “과도한 처벌보다는 재활·교정에 집중해야 한다”는 여론이 가세했다.
이후 이들 도시에선 마약 거래와 절도, 폭행, 총기 사고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워싱턴 DC는 작년 전체 범죄 건수 대비 살인·강도 등 강력 범죄 비율이 전년 대비 30% 가까이 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난해 약물 과다 복용으로 길거리에서 숨진 사람은 806명에 달했다. 범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이어졌고 공권력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치안 불안에 분노한 샌프란시스코 주민들은 2022년 7월 불신임 투표를 거쳐 체사 부딘 샌프란시스코 검사장을 쫓아냈다. 주민 상당수는 임기 초 범죄 관용 정책에 우호적이었던 런던 브리드 샌프란시스코 시장도 퇴출시키겠다고 벼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첫 흑인 여성 시장인 민주당 소속 브리드는 11월 재선을 앞두고 범죄 강경 대응 기조로 돌아섰지만, 최근 지지율은 20%대까지 떨어졌다. 미 매체 악시오스는 “민주당 우세 지역의 놀랍고도 극적인 입장 변화는 유권자들 사이에서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좌우) 이념을 불문하고 커지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했다.
공화당은 “민주당의 범죄 정책이 실패했다”며 맹공을 퍼붓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미 연방수사국(FBI)의 최근 통계를 바탕으로 “범죄율이 안정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FBI는 작년 살인 범죄 건수가 전년 대비 13.2% 줄었다고 19일 발표했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팬데믹 이후로 강력 범죄가 급등했고, 아직도 주요 대도시는 팬데믹 이전보다 범죄율이 훨씬 높은 상황”이라며 “전국 차량 절도는 1년 전보다 오히려 10.7% 증가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