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식탁에 오른 바지락, 오징어 등 일부 중국산 수산물은 중국 가공 회사들이 북한 노동자 최소 수백 명을 고용해 수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지난해 4월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둥강의 한 수산물 도매시장에서 북한산 추정 제품을 비롯해 수산물을 판매하는 모습. /단둥=이벌찬 특파원

북한 주민들의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중국산 수산물을 한국이 대량 수입·유통<본지 8일 자 A1·10면>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미 연방 의회가 “즉각 중단하라”며 공개 경고에 나섰다. 제3국 기업의 북한 주민 고용은 북한 노동자가 번 외화가 핵(核) 및 미사일 개발에 사용되지 못하도록 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 제재 위반이다. 미 의회는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망이 중·러 등의 훼방으로 느슨해진 상황에 한국마저 제재 위반을 방조하는 상황을 특히 우려하는 분위기다.

이 같은 조사 결과가 공개되자 한국 대형 유통 업체 쿠팡과 롯데마트는 9일 상품 판매를 중단하기로 했다. 이들 회사는 국제 제재 등으로 문제가 된다고 판단되는 상품들은 노출 차단과 함께 판매를 중단한다는 내부 방침에 따라 이같이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 ‘의회·행정부 중국위원회(CECC)’ 공동 의장인 크리스 스미스 공화당 하원 의원은 이날 성명을 내고 “북한 주민들이 중국에서 (강제적으로) 가공한 수산물이 전 세계 식탁에 오르고 있다”며 “이러한 수입(관행)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밝혔다. CECC는 중국의 인권과 법치 문제를 감시하기 위해 상·하원의 민주·공화 양당이 2000년 출범시킨 초당적 의회 기구로, 미 행정부의 대중(對中)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 의회가 동맹국의 수입 관행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만큼 북한 주민들이 사실상의 ‘노예 노동’을 통해 생산한 수산물을 한국이 대량 수입하는 지금의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의 제재 위반 활동을 감시해 온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 패널의 임기 연장이 러시아의 반대로 최근 부결되자 북한의 제재 위반 행위를 감시하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우려도 크다. CECC의 스미스 의장은 이날 본지에 보낸 성명에 “중국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북한 주민들은 대부분의 월급을 빼앗기고, 이는 결국 북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에 쓰인다”며 “한·미·일의 어떤 소비자도 이런 결과는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의회 내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의 공동 의장도 맡고 있는 스미스 의장은 북한과 중국 등 독재국가들의 인권 탄압 문제를 적극 제기해왔다. 전임 문재인 정부의 대북전단금지법과 2019년 탈북 어민 북송 사건 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의견을 내온 ‘인권 원칙론자’다.

스미스 의장은 “한·미·일 동맹 3국 간의 공조가 더욱 강화돼야 한다”며 “우리가 함께 협력할 때 북한 및 중국에 보내는 메시지가 더 강력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한·미·일 정부가 중국 내 북한 강제 노동 정보를 공유해 수입을 차단하고, 3국간 협의를 통해 통해 관련 기업들에 대한 제재 등을 밟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픽=양진경

한·미·일 및 북·중 사안 등 핵심 외교 현안을 다루는 하원 외교위 인도·태평양 소위원장인 영 김 공화당 하원 의원도 이날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으로 수입되는 중국산 해산물이 북한의 강제 노동을 통해 생산됐다는 (조선일보의) 보도를 보니 우려스럽다”면서 한국 업체들의 즉각 수입 중단을 촉구했다. 미 의회에선 “한국 정부가 앞장서서 북한의 강제 노동 실태를 조사하고, 관련 수산물 수입 중단 및 제재 조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김 위원장은 작년 3월 소위원장 취임 당시 본지 인터뷰에서 “북한 인권을 우선적으로 다루겠다”고 했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북한 김정은은 핵무기 무기고를 늘리기 위해선 누구든, 무엇이든 사용하겠다고 몇 번이고 밝혀왔다. 북한 강제 노동이 대표적 사례”라며 “유엔 안보리가 (한국의 중국 수산물 수입을) 용납해선 안 된다”고 했다. 안보리 제재를 위반할 경우 국제사회의 각종 경제 제재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한 셈이다.

미 대북 단체와 국제 학계의 우려 목소리도 크다. 미 인권 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의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이날 본지에 “중국의 해산물 가공 공장은 북한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강제 노동시키는 것으로 악명 높다. 김정은의 핵 개발에 도움을 주는 행위를 한국 정부가 막아야 한다”고 했다. 영국 킹스칼리지의 라몬 파체코 파르도 교수는 “한국 정부는 실태 파악에 나서고 국회는 법적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미국의 비영리 단체 ‘아웃로 오션 프로젝트’는 중국 공장들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 20여 명을 지난해 인터뷰한 결과, 중국 회사 최소 15곳이 1000명 넘는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이 같은 강제 노동을 통해 생산된 수산물이 한국으로 대량 유통되고 있다고 ‘아웃로 오션 프로젝트’는 밝혔다.

단둥 타이화 냉동 바지락살
그래픽=양진경

국제사회의 잇따른 경고에도 한국 업체들이 들여온 중국산 수산물은 여전히 업계 상위권의 대형 마트 및 온라인 쇼핑몰들에서 계속 유통되고 있다. 문제의 업체 중 하나인 ‘단둥 타이화’가 한국으로 수출한 바지락 제품은 마켓컬리 등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다른 중국 회사 ‘단둥 타이펑’에서 조개류 등 각종 해산물을 수입하는 한국의 한 수입 업체는 홈페이지에 이마트 등의 즉석 수산물 조리 코너에 자사 제품이 오른다고 광고 중이다.

이에 대해 한 대형 마트 관계자는 본지에 “바지락을 한국으로 들여오는 수입 업체가 미국 한 비영리단체의 요청을 받고 중국 회사 측에 북한 노동자 고용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한 결과, ‘북한 노동자를 모두 돌려보냈고 향후에도 생산 작업에 이들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다른 나라가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은 안보리 제재 위반이기 때문에 중국 기업은 북한 노동자들의 고용을 공식적으론 부인하고 있다.

미 정가에선 “대북 제재 위반, 북한 인권 탄압을 규탄한 미 의회의 즉각적인 반응이 한국 정부와 대비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통일부는 지난 8일 정례 브리핑에서 관련 사안에 대해 “제3국에서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는 건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안에 위반되는 것인 만큼 모든 회원국에 의무 준수를 촉구한다”고만 했다. 북한 강제 노동이 투입된 수산물의 한국 유통에 대한 질문엔 “확인해 드릴 내용이 없다”고 답했다.


☞北 해외 노동 안보리 제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 핵실험에 대응해 2017년 9월 채택한 대북 제재 결의 2375호를 통해 북한 노동자에 대한 유엔 회원국의 고용 허가 부여를 금지했다. 아울러 그해 말 채택된 2397호는 이미 일하고 있는 해외 북한 노동자의 경우 2019년 12월 22일까지 북한으로 모두 돌려보내도록 했다. 하지만 러시아·중국 등이 북한 노동자를 채용하는 정황이 이후에도 계속 포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