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일본·필리핀이 11일 사상 첫 3자 정상회의를 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남중국해 합동 해상 훈련을 하기로 합의했다. 중국을 ‘세계 안보·번영의 최대 도전’으로 규정한 미국이 다수의 다자 협의체를 통해 ‘따로 또 같이’ 움직이는 격자형(lattice-like) 동맹 체제 구축에 나선 가운데, 우방국들이 여기에 속속 합류하고 있다.
이날 3국 정상은 “중국의 위험하고 공격적인 행동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며 중국을 겨냥한 메시지를 냈다. 미국은 중국과 무역 분쟁을 겪고 있고 필리핀은 남중국해에서, 일본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중국과 영유권 분쟁 중이다. 미국을 국빈 방문 중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이날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미국이 세계 평화·안정의 부담을 혼자 짊어지지 않도록 일본이 적극 돕겠다”고 했다. 한편 한·미는 11일 미 워싱턴 DC에서 개최한 제24차 통합 국방 협의체(KIDD)를 통해 “인·태 지역에서 안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한·미·일 협력이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했다.
미국과 동맹국의 관계 강화는 중국·러시아·북한 등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협력을 공고히 하는 권위주의 국가들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날 중국 공산당 서열 3위인 자오러지(趙樂際)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국회의장 격)은 평양에 도착해 최룡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만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중도 연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일본·필리핀 3국은 정상회의를 통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에 대항할 필리핀의 투자 프로젝트인 ‘루손 회랑’을 출범시켰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세 나라가 파트너십의 새 시대를 열었다”며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항공기·선박·군대에 대한 그 어떤 공격이 발생하면 미·필리핀 상호방위조약이 발동될 것”이라고 했다. 미 의회는 초당적인 공감대 아래 필리핀 국방 강화를 위해 25억달러(약 3조4000억원)를 지원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기시다는 이날 약 34분 동안 영어로 의회 연설을 했다. 중국의 대외 입장과 군사 행동, 북한 핵·미사일 프로그램,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언급하며 “국제 질서가 우리와 가치·원칙이 매우 다른 이들로부터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고, 전 세계에서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했다. 이어 “세상은 미국이 계속해서 국가 간 문제와 관련해 중추적 역할을 하기를 필요로 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우주선에 일본이 동승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대중(對中) 견제에 핵심 파트너가 일본이라는 뜻이다. 그의 연설엔 열 번 이상의 기립박수가 나왔다. 미·일은 전일 정상회담에서 주일 미군과 일본 자위대의 연계 강화, 무기 공동 개발·생산 등 “(1960년) 미·일 동맹이 체결된 뒤 가장 중요한 업그레이드”(바이든 미 대통령)에 합의했다.
미국은 자국을 중심으로 양자 동맹을 다수 구축하는 ‘허브 앤드 스포크(hub and spoke·중심축과 바큇살)’ 구조보다 한·미·일 같이 소수의 동맹국이 ‘따로 또 같이’ 움직이는 격자형 안보 체계가 중국 견제에 더 효과적이라고 보고 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사상 처음 열린 미·일·필리핀 정상회의도 이런 맥락에서 열렸다. 바이든은 “세 나라가 파트너십의 새 시대를 열었고, 미국의 방위 공약은 철통같다”고 했다.
같은 날 열린 미국과 뉴질랜드 외교장관 회담에선 미 주도 안보 협의체인 오커스(AUKUS, 미국·영국·호주), 쿼드(Quad, 미국·인도·호주·일본)에 “뉴질랜드가 실질적으로 관여할 이유가 강력하다”는 성명이 발표됐다. 일본은 인공지능(AI), 극초음속 기술 등을 공동 개발하는 오커스의 ‘필러2′에 합류하기로 했고, 뉴질랜드·캐나다 및 한국 등의 추가 가입이 거론된다. 한국은 지난해 8월 이른바 ‘캠프 데이비드 합의’로 제도화된 한·미·일 협력을 제외하면 아직은 다른 협의체와 연계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은 없다.
한편 중국은 미·일·필리핀의 밀착 행보에 적나라한 불만을 드러냈다. 외교부는 12일 류진쑹 아주사장(국장)이 주중 일본대사관의 요코치 아키라 수석 공사를 초치해 “미·일·필리핀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에 부정적인 움직임을 보인 데 대해 엄정한 교섭(외교 경로 통한 강력한 항의)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중국 해경국 소속 함정 편대는 이날 일본과 영토 분쟁 중인 센카쿠열도 인근에서 해양 순찰을 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