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동맹을 위해 돈을 투자하는 국가를 중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맹국이 ‘공정한 몫’을 수행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미국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헤리티지재단의 케빈 로버츠(58) 회장은 지난 10일 본지와 전화 인터뷰에서 한·미가 조만간 개시할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 협정(SMA) 협상을 두고 이같이 밝혔다. 11월 치러지는 미 대통령 선거의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인 그는 현재 ‘트럼프 2기’를 대비한 정책 개발 및 인재 영입을 총괄하고 있다. 트럼프와 자주 통화한다는 로버츠는 이날 인터뷰에서 ‘한국의 방위비 지출’을 네 차례 언급하면서 한국 정부가 “현직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 아닌 (재집권할 수 있는) 트럼프와 협상해야 한다”고 했다. 한·미가 트럼프 재집권을 의식해 2026년부터 적용될 방위비 협정 작업에 최근 착수한 데 대해 나온 경고성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로버츠 회장은 트럼프 대선 구호이자 정치 이념인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열렬한 신봉자다. 워싱턴 DC의 정계 인사가 아닌, 보수 성향이 강한 텍사스주(州) 출신인 그에게 미 언론들은 ‘카우보이 보수주의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로버츠는 “우리는 자유무역을 믿는다. 하지만 지금 (세계의) 무역은 자유나 공정과 거리가 멀다”고 했다. 트럼프 재집권 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무역협정 개정, 대미(對美) 한국 수출품에 대한 관세 인상 등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헤리티지가 ‘프로젝트 2025′를 통해 차기 보수 정권용으로 만든 900쪽짜리 정책 제언집 ‘보수의 약속(The Conservative Promise)’은 미 정가에서 사실상 ‘트럼프 2기 공약집’으로 통한다. 한국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등이 방위비를 더 부담하고 미국의 부담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줄이는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로버츠 회장은 이 보고서에 대해 “트럼프의 의중을 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가 주류 정치인과 관료를 불신하는 가운데 로버츠가 이끄는 헤리티지는 사실상 트럼프를 위한 공약집을 만드는 등 트럼프 진영의 ‘전략실’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헤리티지재단의 케빈 로버츠(58) 회장. 사진은 로버츠 회장이 작년 4월 헤리티지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헤리티지재단

-트럼프가 정책집 작성에도 참여했나.

“트럼프와 자주 사적으로 대화한다. 헤리티지 내부 관리자들과 트럼프 캠프 내부 정책 조율팀 간 지속적인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 트럼프가 구상하는 정책 및 인사 등의 계획을 전적으로(in totality)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트럼프는 1기 당시 한국에 과도한 분담금 증액을 요구했었다. 2기엔 어떨까.

“일단 한국이 국방비를 늘리려고 노력하는 데 박수를 보낸다. 한국 정부는 계속 방위비 지출을 늘려야 한다. 트럼프가 재임 당시 나토 회원국들이 충분히 방위비를 지출하지 않는다고 질책했을 때, 그는 나토에서 단순히 탈퇴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공정한 몫을 수행하기를 원했다. 미국이 한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 전하려는 메시지다.” (트럼프는 지난 2월 유세 현장에서 재임 시절, 나토의 한 회원국에 “돈을 충분히 내지 않으면 러시아 침략 시 보호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트럼프는 여러 차례 한·미 (경제) 관계가 ‘불공정하다’고 했었는데, 재선 시 경제 압박 조치를 할까.

“까다로운 질문이지만 솔직하게 말하겠다. 트럼프는 훌륭한 협상가다. (한·미 무역에 대한) 그의 발언이 사실은 협상을 위한 차원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헤리티지는 자유무역의 가치를 믿는다. 그러나 평범한 미국인의 관점으로 보면 흔히 ‘자유무역’이라고 불리는 행위가 실제론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트럼프의 말이 옳다. 미국은 러스트 벨트(rust belt·제조업 쇠퇴 지역) 노동자들, 일반 중산층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헤리티지는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미국과 개별 국가 간 관세 문제, 무역협정 등에 대해 공식·비공식 대화에 나서는 것을 적극 지지한다.”

-삼성·SK 등 한국 기업들이 대미 투자를 최근 급속도로 늘리고 있는데.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기업들이) 미국 내 공장을 확장해 더 많은 미국인이 그 회사들과 일한다면 매우 잘된 일이다. 우리 집에선 미국산 전자 제품을 찾을 수 없다. 죄다 한국산이다. 많은 미국인 집이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미국인들이 한국 제품을 애용하는 만큼,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서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절인 2018년 7월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과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난 모습. 올해는 나토 결성 75주년이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했을 때 나토 차원에서 유럽 동맹국들을 러시아의 위협에서 얼마나 잘 지켜줄지는 미지수라는 평가가 나온다. /AP 연합뉴스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로 대표되는 미국 보수의 ‘황금 시대’를 레이건과 함께 이끌었던 헤리티지는 해외 이슈에 적극 개입하면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확장해야 한다는 공화당 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하지만 로버츠가 회장에 오른 2021년 이후 헤리티지의 기조는 바뀌고 있다. 이른바 ‘트럼피즘(Trumpism·트럼프주의)’을 최전선에서 확산시키면서 “미국은 더 이상 먼 나라 갈등에 참견할 여유가 없다. 국내 문제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 중이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도 중단해야 한다고 헤리티지는 주장한다.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 등 일부 공화당 중진까지도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중단이 ‘고립주의적’이라며 반대하고 있지 않은가.(고립주의는 미국이 다른 나라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고 미국 최우선주의를 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고립주의자가 아니다. 현실주의자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적성 국가인 러시아에 맞서 승리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미국엔 (중국의 위협이 커지는) 인도·태평양 지역이 유럽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미국은 인·태 지역에서 매우 긴밀하게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 이는 한국 정부에도 좋은 소식 아닌가. 트럼프는 중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과 함께 굳건히 설 것이라고 본다.”

-중국이 혹시라도 대만을 침공하면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하길 기대하나.

“한국은 무조건 군사 지원을 해야 한다. 한국·일본·필리핀은 (중국의) 침공 직후부터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미군이 대만을 전면 방어할 시간을 이 국가들이 벌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대만을 방어할 의향이 있다고 밝히고 방위비 지출을 늘릴수록 중국에 대한 역내 억지력이 강화된다.”

-트럼프가 ‘북한 비핵화’ 목표를 접을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는데.

“북한이라는 사악하고 기괴한 정권과 대화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낸다. 북한 비핵화를 추구하기 위한 미국 대통령의 역할은 이래야 한다. 한국엔 비핵화 가능성이 멀어 보일지라도, 이는 미국 등 국제사회가 계속 추구해야 하는 목표다. 우리는 앞으로도 트럼프가 (비핵화를 위해) 북한과 협상하기를 바라고 있다.”(트럼프는 김정은과 총 세 차례 정상회담을 했지만 바이든은 ‘핵 개발 포기가 먼저’라고 했고, 현재는 김정은과 대화가 단절된 상태다.)

2013년 8월 미국 와이오밍주의 한 목장에서 말을 타고 있는 케빈 로버츠(당시 와이오밍 가톨릭대 총장) 헤리티지재단 회장. 텍사스주 출신인 로버츠의 별명은 '카우보이 보수주의자'다.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바이든의 정책은 뒤집힐까.(미국 보수 진영은 친환경 에너지 확대 등을 골자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석유 생산이 많은 미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악법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트럼프 재집권 시 폐기될 첫 번째 법은 IRA가 되리라 예상한다. 물론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11월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의회 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을 유지할지는 두고봐야겠지만 (지금은 민주당 우세인) 상원을 다시 장악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 IRA가 결국 폐지된다고 믿는 이유는 미국인들이 이 법안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워싱턴 DC를 벗어나 미 전역을 돌면서 미국 노동자들을 만나보니 이 ‘괴물’을 폐지하려는 일반 서민들의 의지가 정말 강하다.”

☞케빈 로버츠(Kevin Roberts)

대학 총장 및 초·중·고 교장을 거친 교육자 출신. 보수 성향이 강한 남부 텍사스주(州)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2013년 와이오밍 가톨릭대 총장 당시 연방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겠다며 정부 학자금 대출 및 세금 지원 등을 모두 거부했다. 그즈음부터 미 언론들이 그를 ‘카우보이 보수주의자’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텍사스의 보수 비영리단체 공공정책재단(TPPF) 회장을 지내면서 재단 규모를 대폭 확대했고, 이 성과를 인정받아 2021년 10월 일곱 번째 헤리티지 회장에 임명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로 ‘트럼프 2기’에 대비한 인재 영입, 정책 개발 등을 지휘하고 있다. 라파예트 루이지애나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 버지니아 공대에서 역사학 석사, 텍사스대에서 미국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

🌎조선일보 국제부가 픽한 글로벌 이슈! 뉴스레터 구독하기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39

🌎국제퀴즈 풀고 선물도 받으세요!https://www.chosun.com/members-event/?mec=n_qu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