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양들의 침묵’ 본 사람 있나요? 한니발 렉터, 정말 훌륭한 남자인데….”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 11일 뉴저지주 유세 중 던진 한마디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증폭되고 있다. 이날 현장에는 약 10만명이 운집했는데, 트럼프가 불법 이민자 문제를 얘기하던 중 돌연 할리우드 역사상 대표적인 ‘빌런(villain·악인)’이자 연쇄 살인마인 한니발 렉터를 “위대하다(great)”며 두둔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에선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넘어 발언의 진의(眞意)를 놓고 여러 해석을 내놓고 있다.
조너선 드미 감독의 ‘양들의 침묵’은 범죄 스릴러 소설가 토머스 해리스가 1988년 출간한 장편 소설을 바탕으로 1991년 개봉한 영화다. 세계적인 흥행에 이어 아카데미상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고, 스릴러물의 걸작을 논할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는 영화가 됐다. 특히 안소니 홉킨스가 연기한 주인공 한니발은 천재 정신과 의사이자 식인(食人)도 마다하지 않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로 대중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영화 한니발과 한니발 라이징, NBC 드라마 한니발 등 이 빌런을 주제로 한 스핀오프 작품들이 다수 제작됐다. 연예 매체인 AV클럽은 “아이코닉한 궁극의 역사상 최고 빌런”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건 트럼프가 한니발을 언급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트럼프는 지난 3월에도 자택인 플로리다주 마러라고에서 열린 타운홀 행사에서 청중을 향해 “혹시 여기 한니발 렉터를 아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 황당한 웃음을 자아냈다. 역시 불법 이민 문제를 얘기하며 이민자들을 “많은 경우 감옥, 정신 병원에 다녀온 거친 사람들”이라고 말한 직후였다. 지난 10월에도 한 유세에서 “한니발 렉터라는 위대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나를 지지했다”고 자랑하듯이 말해 발언 배경을 놓고 부차적인 논란이 있었다. 전직 대통령이자 대선 후보가 가상의 인물이라 해도 식인도 마다 않는 연쇄 살인마를 두둔하는 발언 자체가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14일 트럼프가 뉴욕 법정에 출두하면서 “왜 지난주 토요일에 한니발 렉터를 칭찬했냐”는 질문이 취재진으로부터 나왔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한 점은 트럼프가 이 영화를 매우 인상깊게 봤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11일 유세 중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나는 오랜 친구와 저녁을 할 것”이란 한니발 렉터의 대사까지 인용했다. 인기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지미 팰런은 자신의 방송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며 트럼프의 발언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MSNBC도 “무얼 말하려 했던건지 쉽게 알 수 없었던 기괴한 행동”이라고 했다. 찰리 덴트 전 공화당 하원의원은 CNN에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미친 짓”이라고 비판했고, 퓰리처상 수상자인 언론인 앤 애플바움은 “대선 후보가 연쇄 살인마를 칭찬하고도 아무런 반향이 없는 경우가 미국 역사상 있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트럼프의 발언을 놓고 X(옛 트위터), 틱톡 등 소셜미디어(SNS)에선 사용자들이 각자만의 해석을 내놓으며 백가쟁명식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정작 한니발 렉터를 연기한 홉킨스는 지난 3월 언론에 트럼프를 지지할 것이냐는 질문에 “나는 (대선 후보) 아무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도 지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영화에 함께 출연한 배우 브라이언 콕스는 “트럼프는 미친 사람”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했다. 여주인공으로 열연한 조디 포스터는 올해 1월 리버럴 성향인 스티븐 콜베어의 토크쇼에 등장했고, 정치 패러디에 트럼프에 대한 조롱과 풍자를 녹여냈다. 트럼프의 한니발 렉터에 대한 구애는 일종의 밈(meme)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에는 트럼프와 한니발 렉터를 합성한 캐릭터 스티커 등이 개당 4달러(약 5000원)에 판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