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5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연설을 하고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4년마다 3%도 못 받고 말건가? 표 낭비하지 말고 나에게 투표하라. 당선되면 내각에 자유지상주의자를 꼭 포함시키겠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5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자유당(Libertarian Party) 전당대회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공화당 대선 후보가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연설을 하도록 초청 받은 건 역대 최초인데, 조 바이든 대통령과 박빙의 승부 속 한 표 한 표가 소중한 트럼프가 참여를 결심해 큰 화제가 됐다. 자유당 출신 대선 후보는 2016년 개리 존슨이 3%, 2020년 조 요르겐센이 1% 미만을 득표하는 데 그쳤다. 미미한 수치지만 11월 대선에서는 승패를 좌우할 지도 모른다.


◇ 트럼프 “모든 전쟁 없앨 것” 외치차 환호성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5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연설을 하고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자유를 최고의 정치 목적으로 꼽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는 개인의 자유, 작은 정부, 재정지출 축소 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2008년과 2012년 공화당 대선 경선에 출마한 론 폴 전 상원의원, 그 아들인 랜드 폴 상원의원 등이 자유지상주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정치인들이다. 하지만 성(性)·마약 같은 사회 문제에는 더 개방적이고, 맹목적으로 트럼프를 추종하는 이른바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지지자와는 결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폴리티코 등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가 늑대의 소굴로 뛰어들었다” “그동안의 캠페인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라고 했다. 자유당 지도부 역시 트럼프의 참여가 전당대회 흥행과 티켓 판매는 물론 당의 펀드레이징(선거자금 모금)에 도움이 될 것이란 찬성파, 당이 ‘공화당의 2중대’가 될 것이고 트럼프의 노선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반대파로 나뉘어 내부 갈등이 상당했다고 한다.

트럼프는 이날 오후 8시30분쯤 등장해 약 40분 동안 쉴새없이 말을 쏟아냈다. 그가 중동·유럽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을 끝내 미국은 외국 문제에서 손을 떼고, 이른바 ‘딥 스테이트(deep state)’를 혁파해야 한다고 했을 때 청중에서 큰 환호성이 쏟아졌다. 트럼프는 “지난 70년 동안 내가 전쟁을 시작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라며 “취임 초 북한 김정은이 거의 핵전쟁을 일으킬 상황이었다. 힐러리 클린턴(2016년 트럼프에 패배한 민주당 대선 후보)이 대통령이 됐다면 핵전쟁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자유지상주의의 본산과도 같은 싱크탱크 케이토연구소는 오랜 기간 “미군이 주한미군을 철수해 한반도에서 손을 떼자”(더그 밴도우 연구원)고 주장해왔다. 트럼프는 “미국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해외의 적(敵)이 아닌 우리의 권리를 공격하는 독재자와 공산주의, 파시스트 깡패들”이라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정치인이자 웅변가 페트릭 헨리의 말을 인용했다.


◇ 연설 내내 아수라장… 자유당원 VS 매가 충돌도

25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연설 도중 일부 당원들이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25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연설 도중 일부 당원들이 일어서서 항의의 뜻을 표시하고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트럼프가 연설하는 내내 객석은 아수라장이 됐다. 자유당 당원들은 ‘표현의 자유’를 굉장히 중시하는데 트럼프의 얘기를 최대한 들어는 봐야 한다는 그룹과 문장 하나 하나마다 야유를 보내고 반발한 그룹이 나뉘었기 때문이다. 한 손에 꼭 잡히는 미국 헌법 전문(全文)이 적힌 핸드북을 든 일부 인사들은 트럼프가 바이든 정부의 방만한 재정을 지적하자 무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당신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트럼프 재임 중인 2017~2021년 국가 부채가 84조 달러 늘어난 사실을 꼬집은 것이다. 트럼프가 바이든을 ‘폭군(tyrant)’라 표현하자 청중에선 “그건 바로 당신”이라는 야유가 쏟아지기도 했다. 자유당 고위 관계자가 무대에 올라와 “마치 (우파에 가까운) 조던 피터슨이 (좌파 성향으로 알려진) 버클리대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며 “트럼프가 뭐라고 얘기 하는지 차분하게 들어보자”고 침착함을 독려했을 정도로 한때 분위기가 격앙됐다.

여러 차례 제지에도 불구하고 의자 위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다 경비원에 쫓겨난 이들도 상당 수 있었다. 빨간색 매가 모자를 쓴 트럼프 지지자들이 “우리는 트럼프를 원한다”고 외치면, 당원들이 “연준(FED)을 없애라”고 받아쳤다. 트럼프의 연설이 시작되기 4시간 전부터 입장이 가능했는데, 티켓값만 수백~수천 달러를 지불하고 전국에서 모인 자유당 당원들과 ‘초대 게스트’인 트럼프만 보러 몰려든 매가 지지자들 사이에 자리를 뺏고 빼앗는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부 친(親)트럼프 성향 인플루언서들은 X(옛 트위터)와 틱톡 등에 자신들이 앞자리에서 쫓겨난 영상을 올리며 “이게 진정 자유를 신봉하는 당의 모습이 맞냐”라고 비판했다.


◇ 트럼프 “4년 마다 지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하라” 발끈

무소속 로버트 F. 케네디 후보의 러닝 메이트인 니콜 섀너핸(가운데)이 25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당원들과 얘기를 하고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트럼프 역시 지지와 환호성 일변도였던 기존 유세와 달리 계속해서 야유가 쏟아지자 중간 중간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연설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4년 마다 그렇게 지고 싶으면 계속 자유당 후보에 투표해도 된다. 하지만 조 바이든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 재집권하는 건 막도록 힘을 합쳐야하지 않나”라고 했다. ‘사법 리스크’로 법원에 발이 묶여 있는 트럼프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경쟁이 치열하고 악랄한 반대자들을 상대하고 있다”며 “2024년은 미국의 자유를 위한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는 전쟁광(warmonger)들을 추방하고 이 나라를 워싱턴의 엘리트들로부터 되찾을 것”이라며 “11월 5일이 미국의 위대한 해방의 시작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트럼프는 재집권할 경우 2기 내각에 자유당을 잘 이해하는 인사를 포진시키겠다고 약속해 큰 박수를 받았다.

트럼프가 이날 이례적으로 전당대회에 참석해 연설한 건 다수 여론조사에서 1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제3후보’ 로버트 F. 케네디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정부가 백신 접종을 강제한 것에 불만이 큰 20~30대 자유당원들 사이에서 ‘반(反)백신주의자’인 케네디의 인기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케네디는 트럼프보다 하루 앞선 24일 연설해 호평을 받았고, 이날은 러닝 메이트이자 부통령 후보인 니콜 섀너핸이 당원들과 술을 마시며 격의 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케네디를 지지하는 일부 당원들은 트럼프가 연설하는 도중 ‘바이든과의 양자 토론에 케네디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고무로 된 닭 모양 인형을 눌러 소리를 내는 퍼포먼스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