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과 절망.” “확실한 승리.” 27일 오후 10시 30분,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의 첫 분수령으로 꼽혔던 민주당 소속 조 바이든(82) 대통령과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78) 전 대통령의 1차 TV 토론이 끝나자 민주당과 공화당 진영에서 각각 나온 반응이다. 조지아주(州) 애틀랜타 CNN 스튜디오에서 토론회를 지켜보던 800여 명의 기자들 또한 토론 초반부터 ‘트럼프 승리, 바이든 패배’를 확신했다.
바이든과 트럼프는 2020년에도 각각 현직 대통령(트럼프)과 야당 후보(바이든)로 토론에서 두 차례 맞붙었다. 당시 트럼프는 바이든의 말을 끊고 막말을 해서 비난을 받았고 노련한 정치인 출신인 바이든은 트럼프의 실정(失政)을 비교적 논리적으로 지적했다. ‘리턴 매치’에서 다시 만난 둘은 그러나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트럼프는 여유 있고 자신감에 찬 반면 고령 논란에 봉착한 바이든은 말을 더듬었고 쉽게 흥분했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듯 몇 초간 허공을 보거나 트럼프가 발언할 때 입을 벌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CNN은 “민주당 지지자들이 토론 후 극심한 (대선 패배의) 공포에 빠졌다”고 전했다. 이날 토론은 90분 동안 생중계돼 정책만큼 후보자의 지력과 체력이 부각되리라는 전망이 많았다.
바이든의 불안한 모습이 반복되면서 긴 토론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트럼프의 손을 들어줬다. 이날 CNN 조사에서 응답자 67%는 “트럼프가 더 잘했다”고 했다. 바이든이 나았다는 답변(33%)의 배가 넘었다. 토론 후엔 그동안 후보 교체론에 조심스럽게 대처했던 민주당과 뉴욕타임스(NYT) 등 진보 언론에서까지 “지금이라도 바이든을 다른 후보로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잇달아 나왔다. NYT는 “고령인 바이든 대통령의 불안정하고 멈칫거리는 토론은 민주당 인사들 사이에 후보 교체론을 유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바이든은 이미 예비 경선 절차를 통해 민주당 후보를 사실상 확정 지어 후보 교체가 쉽지는 않지만, 본인이 스스로 물러난다면 8월 민주당 전당대회까지 다른 후보를 세우기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NYT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이제 충분히 봤다. 바이든은 토론회를 꼭 돌려 보고, 다른 후보를 위해 길을 열어주길 바란다”고 썼다.
이날 오후 9시가 되자 대선 주요 경합 지역인 조지아주(州) 애틀랜타 CNN 스튜디오에 마련된 토론장에 바이든과 트럼프가 각각 민주·공화당을 상징하는 파란·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등장했다. 바이든이 먼저 연단에 선 뒤 트럼프가 뒤따라 나왔다. 두 사람은 악수 없이 곧바로 토론에 돌입했다.
트럼프는 과거와 달라진 모습이었다. 트럼프는 2016년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의 대선 토론 때 클린턴의 차분한 공격에 논리적인 반박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었다. 클린턴이 말하는 도중에 혼잣말하듯 고개를 젓고 흥분하듯 말을 자르며 호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날 트럼프는 어조에 여유가 있었고 자신감에 넘쳤다. 바이든의 공격에 화내거나 비웃지도 않았다. 평소와 달리 낙태·경제·이민 등 첨예한 문제에 대해 차분한 어조로 ‘내 생각은 이렇다’라며 자신 입장을 설명했다.
이날 바이든이 “트럼프 때 경제 상황이 안 좋아졌다”는 취지로 트럼프를 공격할 때도 트럼프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여유 있게 웃음을 지었다. 트럼프 최측근들은 토론을 앞두고 “이전처럼 화를 내거나 막말하는 모습을 보여선 중도층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고 조언했다고 CNN은 보도했다. 민주당 지지 성향인 NYT도 “이날 토론에서 트럼프는 비교적 절제되고 집중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교훈을 얻은 모습”이라고 전했다.
화가 난 듯 보이는 쪽은 오히려 바이든이었다. 바이든으로선 지난 3월 국정연설 때 모습을 유권자들에게 다시 보여주는 게 시급했다. 당시 그는 두 시간 동안 박력 넘치는 연설을 해 단숨에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지난 일주일간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토론 준비를 할 때 참모들은 바이든에게 ‘국정연설 때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자세’를 유지하라고 조언했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하지만 바이든은 이날 트럼프의 발언 중간중간 입을 벌린 채 멍하게 허공을 보거나 얼굴을 찡그리는 등 기운 없는 모습이 역력했다. 목소리가 심하게 쉬고 자주 말을 더듬어 발언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 바이든 캠프 측은 그가 “심한 감기에 지난 며칠간 시달렸다”고 했다. ‘패배자(loser)’ ‘호구(sucker)’ 등 트럼프가 쓸 만한 표현을 바이든이 트럼프에게 한 것도 패착이었다는 평가다. 트럼프가 바이든에게 “어린애처럼 행동하지 말자”고 할 정도였다.
바이든이 남부 국경의 이주자 통제에 대해 답하며 “총체적 대책”을 “총체적 (입국) 금지”라고 잘못 말하는 등 실수를 하자 트럼프는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이 뭔지 못 알아듣겠다. 자기도 모를 것”이라고 공격했다. 바이든은 앞서 보건 및 건강보험 관련 발언을 하면서 수 초간 말을 멈췄다가 대충 매듭짓기도 했는데, CNN은 “바라보기에 참으로 고통스러운(painful) 장면이었다”고 평가했다. 2016·2020년 대선 때 토론을 진행했던 폭스뉴스 앵커 크리스 월리스는 “(바이든·트럼프 토론 장면은) 자동차 충돌 사고를 슬로 모션으로 보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바이든은 이날 고령 문제에 대한 CNN 진행자의 질문을 받고 “나이가 아닌 성과에 주목해달라”고 했다. 그는 “(나이가 아닌) 기록을 보라. 150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 제조업 (부흥) 덕분에 수백만 달러의 민간 기업 투자 등이 이뤄졌다”며 “한국에 가서 삼성이 미국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도록 설득한 것도 나였다”고 했다. 70대 후반으로 결코 젊다고는 볼 수 없는 트럼프는 나이에 관한 질문에 ‘골프 실력’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건강함을 강조했다. 그는 “나는 시니어도 아닌 일반 클럽 챔피언십에서 두 번이나 우승했다. 바이든은 골프공을 50야드(약 45m)도 못 보낸다”고 했다. 그러자 바이든 대통령은 “누가 공을 더 멀리 보내는지 대결해보고 싶다. 만약 (당신이) 골프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닐 수 있다면 기꺼이 같이 치겠다”고 맞받아쳤다.
이날 토론이 끝나고서 스튜디오 맞은편 프레스센터에 마련된 스핀룸(spin room)에선 ‘공화당의 승리’ 분위기가 뚜렷했다. 스핀룸은 토론이 끝나고 각 후보가 기자들을 만나 토론회 결과와 자신의 강점을 홍보하는 공간을 뜻한다. 토론이 끝난 직후 트럼프의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 더그 버검 노스다코타 주지사 등이 취재진을 몰고 다니면서 “트럼프가 이겼다”며 분위기를 띄웠다.
반면 ‘바이든의 선전’을 설득해야 하는 라파엘 워녹 민주당 상원의원(조지아주),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기자들의 질문에 쩔쩔맸다. 민주당의 유력 차기(次期) 주자로 거론되는 뉴섬에게 한 기자는 ‘바이든 대신 (대선에) 출마할 준비가 돼 있느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이에 뉴섬은 “나는 대통령이 자랑스럽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했다. 스핀룸 한쪽에 마련돼 있던 중계석에 앉아있던 CNN 앵커 케이틀린 콜린스는 굳은 표정으로 “바이든은 마무리 발언 때조차 트럼프의 최대 약점인 낙태나 기소 문제를 공격하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다만 트럼프가 이날 수차례 민감한 사안에 대해 동문서답(東問西答)하며 말을 돌리거나 사실이 틀린 발언을 한 점은 문제로 지목됐다. 트럼프는 토론에서 “포르노 배우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발언했는데, 이미 관련 재판에서 유죄 평결까지 받은 사안이어서 사실과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AP는 “트럼프가 경제, 낙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의 국방비 지출 등 각종 현안에 대해 거짓 섞인 정보로 바이든에게 반박했다”고 했다. 미 정치 매체 폴리티코 등은 “오늘 토론으로 트럼프가 주요 중도층의 표심을 얻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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