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냉혹한 전시 상황인데 공화당을 보면 길을 잃은 것(MIA·작전 중 실종) 같아요. 보수가 좌파를 상대로 승리하려면 애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충실히 이행할 군대가 필요합니다.”
9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국가주의적 보수주의(National Conservatism) 2024′ 행사에서 클레어몬트 연구소의 토머스 클링겐스타인 의장이 무대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1979년 설립된 보수 성향 싱크탱크 클레어몬트는 지난해 뉴욕타임스(NYT)가 “미국 우파의 새로운 신경 중추로 떠오르고 있다”고 평가한 곳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TV토론 참패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클링겐스타인은 “급진주의자들이 사적 영역을 침범하고 학교에선 아이들을 흔들어댄다. 바이든의 ‘사법부 무기화’로 트럼프가 유죄 평결을 받았듯 우리는 우리를 파괴하려는 적들과 전쟁을 하고 있다”며 보수 유권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이 행사는 에드먼드 버크 재단 등 미국의 보수 성향 기관 30여 곳이 주도해 8일부터 사흘간 열리고 있다. ‘국가주의적 보수주의’는 엘리트·이민 등에 대한 적대 의식이 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개인보다 국가 주권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작은 정부와 자유 시장을 강조하는 기존 보수 세력과 대비된다”고 했다. 트럼프나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등이 이런 사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꼽힌다. 이날 현장에선 부패하고 무능한 기존 엘리트 집단의 개혁을 촉구한 케빈 로버츠 헤리티지재단 이사장의 신간 ‘워싱턴을 불태워 미국을 구원하자’가 예약 판매되고 있었다. 행사엔 트럼프의 부통령 후보군인 마코 루비오, J D 밴스 상원의원 등을 비롯해 ‘보수 개혁’에 찬동하는 1000여 명이 참석했다.
차기 보수 정부의 집권 의제를 발굴하는 헤리티지재단의 ‘프로젝트 2025′에서는 구인(求人)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 단체는 “트럼프 1기는 공직 사회의 비협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200만달러가 넘는 돈을 들여 차기 정부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언론 대응부터 구매·조달까지 정부 업무의 모든 것을 교육하고 있다. 재단 관계자는 “지금부터 미리 교육하고 검증해야 데이 원(임기 첫날)부터 빠르게 일할 수 있다”고 했다.
보수 생태계를 구축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도 엿볼 수 있었다. 미시간의 보수 성향 대학인 힐스데일 칼리지, 대학에서 보수 사상을 교육하는 비영리 단체 대학간학술연구소(ISI) 등 10여 곳이 부스를 차려 놓고 청년들을 상대로 교육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있었다. 대학 관계자는 “뜻있는 큰손이나 기업들이 기부한 돈으로 보수의 내일을 꿈꾸는 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며 “우리도 중장년이 되면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라고 했다. 장학·교육 사업을 통해 워싱턴 내 20~30대 보수주의자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아메리카 모먼트’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그려진 모자·머그컵 등을 진열해 놓고 회원 가입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 단체의 사우랍 샤르마 대표는 “성숙한 대학생부터 원로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보수의 가장 큰 자원은 사람”이라고 했다.
트럼프 재집권 시 외교·안보 분야 요직에 기용될 가능성이 있는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부차관보는 연설에서 “지나친 확장과 야심 찬 목표, ‘동맹의 신성함’이라는 허황된 개념에 우리 이익을 희생시킨 것이 미국을 수렁에 빠뜨렸다”며 “현실주의에 기반한 외교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미군을) 철수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라며 “우리가 중국을 지배할 필요는 없지만 중국이 우리를 지배해서도 안 된다. 힘 있고 활기찬 동맹국을 환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