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귀로부터 흘러내리는 피가 얼굴에 흥건한 채 단상 아래로 피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1분 만에 두 다리로 일어섰다. 13일 오후 6시 15분쯤 펜실베이니아주(州) 유세장에서 발생한 총격으로 비명이 쏟아지는 가운데 트럼프는 연단에서 솟아 나와 하늘을 향해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싸우자(Fight)”라고 소리쳤다. 그가 비밀경호국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무대에서 내려갈 때 지지자들은 그를 따라 “싸우자, 싸우자!”라고 외쳤고 곧이어 “유에스에이(USA·미국)”라는 구호가 유세장을 뒤덮었다. 트럼프 뒤로는 푸른 하늘에 거대한 성조기가 펄럭였다. 대통령 후보 암살 시도라는 불의의 사건이 ‘불사조 트럼프’의 이미지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트럼프는 이날 펜실베이니아주 소도시 버틀러에서 유세하던 도중 귀에 총을 맞았다. 총격은 그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임명될 전당대회를 이틀 앞두고 벌어졌다.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많은 공화당 지지자들이 피투성이가 된 트럼프 사진을 온라인에 게시하고 있다. 군중을 결집하는 트럼프의 강력한 사진과 영상은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 나아가 트럼프의 전체 정치 경력을 정의할 이미지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라고 전했다. 지난달 토론 참패 후 사퇴 압박에 처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고령 논란과 대조되는 트럼프의 극적인 생존 드라마는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로 대표되는 ‘강한 트럼프’ 이미지를 굳히며 트럼프 지지자들을 더 강하게 결속시킬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날 범인이 쏜 총알은 트럼프의 오른쪽 귀 윗부분을 관통했다. 트럼프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유세에 참석한 지지자 한 명이 목숨을 잃고 두 명은 중상을 입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총격범이 펜실베이니아에 거주하는 20세 남성인 토머스 매슈 크룩스라고 발표했다. 총격범은 미 비밀경호국에 의해 즉각 사살됐다.
총에 맞을 때부터 비밀경호국 요원들에 둘러싸여 무대를 내려가기까지의 2분 남짓한 시간 동안 트럼프가 본능적 정치 감각을 드러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평가했다. 총격 후 연단에서 다시 일어선 트럼프는 ‘미국을 더 위대하게’라고 쓴 특유의 빨간 모자와 곤색 재킷이 벗겨진 채 얼굴에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이었다. 경호국 요원들은 “움직여야 합니다”라고 소리쳤지만 트럼프는 침착한 목소리로 “잠깐, 잠깐, 잠깐만요”라고 말하고서 군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팔을 뻗어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NYT는 “대혼란 가운데 순식간에 나온 트럼프의 행동은 미디어를 다루는 그의 본능을 드러냈고 역사가 잊지 못할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전했다. MAGA 그 자체처럼 보이는 트럼프의 사진과 영상은 X(옛 트위터)와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계속 재생되며 ‘맞서 싸우는 트럼프’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영상엔 트럼프가 비교적 침착하게 “신발 좀 신읍시다”라고 반복해 말하는 소리도 담겼다.
트럼프는 총격 약 두 시간 반 후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오른쪽 귀의 윗부분을 관통한 총알에 맞았다. 이런 일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하나님이 미국을 축복하시기를”이라고 올렸다. 이어 총격 약 여섯 시간 후인 14일 0시 30분쯤 뉴저지주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건강하게 내려 힘 있게 걷는 모습을 공개했다. 트럼프는 14일 다시 트루스소셜에 “하나님만이 상상 못할 일을 막았다. 악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썼다.
트럼프의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알려진 후 지지자들은 X 등 소셜미디어에 주먹을 쥔 트럼프 사진을 공유하며 “신이 트럼프를 구했다” “신이 승리한다” “트럼프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환호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등 주요 인사들의 지지 선언도 잇따랐다. 폴리티코는 “트럼프의 자녀들조차 아버지가 살해당할 뻔한 상황에 충격보다는 (이번 총격으로) 이겼다고 느낀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트럼프의 아들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는 X에 “그(아버지)는 미국을 구하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피를 흘리며 주먹을 든 트럼프의 사진을 올렸다.
보수 진영에선 선거 기간 최대 이벤트 중 하나인 전당대회를 불과 이틀 앞두고 벌어진 이번 일로 MAGA 지지자들이 결집해 지지율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반면 고령에 쇠약해진 모습을 보인 지난달 TV 토론 이후 당 안팎의 퇴진 요구에 직면해온 바이든 대통령은 ‘총격에서도 살아남은 무소불위 생존자’ 이미지를 앞세우는 트럼프의 기세를 뒤집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공화당 인사들은 총격 사건의 원인까지 민주당으로 돌리려는 분위기다. 공화당의 유력한 부통령 후보인 J.D. 밴스 상원의원은 “바이든 캠프의 대전제는 ‘트럼프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야 할 권위주의적 파시스트’라는 것”이라며 “이런 수사(修辭)가 트럼프에 대한 암살 시도로 이어졌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선거 캠프를 총괄하는 크리스 라시비타는 “바이든을 투표로서 심판해달라”고 했고, 마이클 콜린스 하원의원은 바이든이 트럼프를 ‘표적’으로 삼아왔다는 점을 거론하며 “바이든을 암살 선동 혐의로 기소하라”고까지 했다.
트럼프는 15~18일 경합주 위스콘신의 밀워키에서 열리는 전당대회 때 공화당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될 예정이다. 당원과 지지자들 입장에서 보면 바이든 정부의 ‘탄압’을 받아온 트럼프가 날아오는 총알도 피해가며 살아남아 ‘대관식’을 갖는 완벽한 서사 구조가 갖춰졌다. 지난 5월 트럼프가 ‘성추문 입막음 돈’ 사건으로 뉴욕 법원에서 유죄 평결을 받았을 때도 성난 지지자들이 결집하며 후원금이 48시간 만에 7000만 달러(약 960억원) 이상 쏟아진 적이 있다. 전당대회를 주관하는 공화당전국위원회(RNC)는 이날 성명을 통해 “트럼프는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모두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 입장에선 이번 사건이 바이든이 가장 공을 들여온 지역 중 하나인 경합주 펜실베니아에서 일어났다는 점이 특히 껄끄러운 상황이다. 트럼프가 이날과 같은 기세로 11월까지 선거 캠페인을 몰아갈 경우 바이든이 국면 전환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말을 맞아 델라웨어주에 머물던 바이든은 트럼프 총격 후 백악관으로 긴급히 이동해 상황을 챙겼다. 바이든 캠프는 언론에 “트럼프를 비판하는 내용의 지지자 메시지 발송을 일시 중단하고, TV 광고도 최대한 빨리 내릴 예정”이라고 했다. 폴리티코는 “공화당 의원들은 이날 총격 사건으로 백악관으로 가는 트럼프의 길이 쉬워진 것은 물론, 상·하원 선거에서도 승기를 잡을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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