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정보국(CIA) 대북(對北) 분석관 출신인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53·한국명 김수미)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미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한 혐의로 연방 검찰에 의해 16일 기소됐다. 테리 연구원은 약 10년에 걸쳐 고가의 가방·의류, 고액의 현금 등을 제공받은 대가로 한국 정부에 미국의 비공개 정보를 넘겨온 혐의 등을 받고 있다. 이날 검찰은 테리를 기소하면서 동맹국인 한국의 정보 당국이 깊게 연계됐다고 이례적으로 상세하게 공개했다. 미국의 안보 이익을 침해한 한국 정부에 ‘경고성’ 메시지를 보낸 것 아니냐는 관측과 함께 이번 사건의 여파가 한미 관계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본지는 이날 31쪽 분량의 뉴욕 맨해튼 연방검찰 공소장을 입수했다. 검찰은 공소장에 “테리가 한국 정부의 요원(agent)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 활동했다”고 적었다. 이에 따르면 테리 연구원은 2013년부터 최근까지 10여 년간 워싱턴 DC 및 뉴욕에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된 고위급 한국 국가정보원 요원들과 만나 비공개 정보 등을 건네고 한미 정부 관계자들 간 모임을 주선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 대가로 테리는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 핸드백과 3000달러(약 410만원)가량의 돌체앤가바나 코트, 3만7000달러(약 5100만원)가량의 뒷돈 등을 받았다고 검찰은 밝혔다. 공소장은 국정원 요원들이 테리를 위해 명품 가방을 직접 고르고 선물한 뒤 대사관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을 타고 함께 떠나는 사진 등도 공개했다.
미국은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에 따라 외국 정부나 정당, 회사 등의 정책 및 이익을 대변하거나 홍보하는 사람은 미 법무부에 등록하고 그 활동을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테리는 이 규정을 알고서도 고의로 지키지 않았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다.
유력 인사와 만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국정원의 통상적 업무이지만, 테리와 협력하는 과정에 포착된 국정원의 치밀하지 못한 처신이 문제를 키웠다는 의견이 나온다. 상식을 벗어나는 고가의 명품 백을 선물하거나 테리가 미 정부 측 고위 인사와 비공개 회동을 하고 나오자마자 대사관 공식 차량으로 태우고 가는 장면이 미 수사 당국에 모두 포착돼 공소장에 적시됐다. 국정원 측은 “이번 기소와 관련해 미국 정보 당국과 긴밀히 소통 중”이라고 밝혔다.
테리와 그의 변호인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한국계 이민자 출신인 테리는 미국 하와이와 버지니아에서 컸다. 뉴욕대에서 정치과학으로 학사를, 보스턴 터프츠대에서 국제관계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1~2008년 CIA 수석 분석가로, 이후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에서 한·일·오세아니아담당 국장을 지냈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 윌슨센터 아시아프로그램 국장 등을 거쳤다. 탈북민 일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유토피아를 넘어서’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테리와 국정원 간 첫 교류는 그가 CIA를 떠난 지 5년 뒤인 2013년부터 시작됐다. 공소장에 따르면 주(駐)뉴욕 유엔 한국대표부 외교관(공사)으로 가장한 국정원 고위 요원과 처음 만난 테리는 2016년까지 이 국정원 요원과 지속적으로 교류해왔다고 한다. 이때부터 미 수사 당국은 테리가 국정원 요원들과 접촉한 동선과 통화·이메일, 실제 대화 내용 등을 지속적으로 파악해왔다. 수사가 적어도 수년에 걸쳐 장기간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미 수사 당국은 이듬해 2014년 테리를 소환했다. 미 연방수사국(FBI) 맨해튼 지부에 자발적으로 출석한 테리는 국정원과의 접촉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공소장은 “국정원 요원과 연락한 사실에 대해 질문받자 그녀는 눈에 띄게 긴장했고, 어조도 바꾸면서 말을 더듬었다. 당시 테리는 한국 국정원 요원을 만난 사실을 인정했지만, 요원 이름을 기억 못한다고 했다가 기억난다며 말을 바꾸기도 했다”고 밝혔다. 당시 테리를 조사했던 FBI 요원은 “한국 정책 전문가 집단에서 당신의 지위를 고려할 때 NIS(국정원)가 금품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정보 등을 요구할 수 있다”고 경고를 했다. 테리는 ‘알겠다’는 취지로 답했지만 이후에도 국정원 요원들에게 정보 등을 제공하고 금품을 수수했다고 미 검찰은 밝혔다.
국정원 직원은 2019년 11월 13일 테리와 동행해 메릴랜드주의 한 매장에서 2845달러짜리 돌체앤가바나 코트를 사줬다. 이 직원의 신용카드로 계산했고 외교관 지위를 활용해 면세 혜택도 받았지만, 구매 실적은 테리의 계정에 등록됐다고 검찰은 밝혔다. 테리는 이틀 뒤 돌체앤가바나 코트를 환불하고 차액은 본인이 지불하는 방식으로 4100달러짜리 크리스찬디오르 코트를 구매했다.
돌체앤가바나 코트를 산 날 두 사람은 워싱턴 DC의 다른 가게에도 가서 2950달러짜리 보테가베네타 가방을 구매했다. 이 장면은 가게 안에 설치된 보안 카메라로도 확인이 가능했는데 국정원 직원이 계산하자 옆에 서있던 테리가 가방을 들고 나갔다. 2020년 8월엔 이 직원의 후임자가 테리가 미 정부 인사들도 참여한 화상 워크숍을 주선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3450달러짜리 핸드백을 구매해줬다. 후임자는 이듬해 4월에도 테리와 함께 워싱턴 DC의 루이비통 매장에 들러 3450달러짜리 핸드백을 사줬고 이 역시 카메라에 잡혔다. 쇼핑을 마친 두 사람은 대사관 번호판이 달린 차량에 나란히 탑승해 스시 식당에서 밥을 함께 먹었다. 검찰은 이에 앞서 같은 해 1월 테리가 국정원 고위층과 미 국방부 당국자 등과의 회동을 주선했다고 적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코트와 가방을 사줬음을 시사한 것이다.
테리는 2022년 6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의 비공개 회의에서 나온 미국 정부의 대북 정책 관련 비공개 메모를 한국 정부에 전달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당시 워싱턴 DC 국무부 청사에서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소규모 회의엔 블링컨 장관, 고위 국무부 관료들과 함께 테리를 포함한 다섯 명의 한반도 전문가가 참석했다. 이 자리는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과 외교 관료들이 한반도 문제를 두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당시 회의는 언론 보도 및 외부 유출이 불가능한 ‘오프더레코드’를 전제로 이뤄졌다고 한다. 그러나 테리는 회의가 끝난 직후 블링컨의 발언을 포함해 수기(手記)로 작성한 회의 내용을 한국 정부에 넘겼다. 검찰은 “국무부 회의가 끝난 직후 국정원 요원이 대사관 번호판이 달린 차량에 테리를 태운 뒤 그가 작성한 두 페이지 메모를 촬영했다”고 밝혔다.
공소장을 보면 미 수사 당국은 테리와 국정원 간 관계를 10년간 추적해오면서 그들 간의 대화나 통화 등을 실시간 도·감청한 것으로 추정된다. 검찰은 “2021년 4월 루이비통 매장에서 국정원 직원과 함께 가방을 산 테리는 번호판이 대사관 명의로 돼 있는 차량을 함께 타고 워싱턴 DC의 초밥집으로 향한 뒤 저녁을 먹었다”며 “테리와 국정원 요원은 한국 문제를 담당하는 미 국무부의 고위 관료와의 친분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했다.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나눈 대화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미 수사 당국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검찰은 공소장을 통해 수차례 국정원 요원들이 대사관 번호판이 달린 차량을 버젓이 타고 테리 연구원과 이동했다고 밝히고 있다”며 “허술한 국정원의 정보 활동이 도마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미 검찰이 테리를 기소하면서 한국 정보 당국의 첩보 활동을 상세하게 밝힌 것을 두고 미 정가에선 “동맹 관계와 별개로 한국 정보 당국이 비공식 루트를 통해 정보 활동을 하는 데 대해 ‘경고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테리가 미 국무장관 발언 등을 담은 미 정부 정보 등은 모두 편집(redacted) 처리한 반면, 테리와 국정원 간 접촉 및 대화 내용 등은 상세히 공개했다. 국정원 당국자가 지난해 1월 전(前) 정권과의 차별화를 위해 “핵잠수함이나 항공모함 등 미국의 전략 자산을 정기적으로 배치해주길 기대한다”고 테리에게 말했다는 민감한 내용도 공소장에 적시했다.
워싱턴 DC의 한 소식통은 “윤석열 정부와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한·미 동맹 강화는 물론 한·미·일 3각(角) 협력 강화 등으로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현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의외라는 반응이 많다”며 “향후 한국 정부의 대외 정보 활동에 상당한 차질이 있을 전망”이라고 했다. 한미 정부가 한반도 전문가들과의 광범위한 의견 수렴을 통해 한반도 정세 분석 및 향후 정책 구상을 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른 전문가들의 활동도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기소에 대해 “(미국의 안보를 침해하는) 외국의 영향력 문제에 맞서기 위한 법무부의 노력”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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