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 테리 박사가 지난해 11월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탈북민과 북한 인권에 대한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 상영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3.11.6/뉴스1 ⓒ News1 김명섭 기자

미국 중앙정보국(CIA) 대북(對北) 분석관 출신인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52·한국명 김수미)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미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한 혐의로 연방 검찰에 의해 16일 기소됐다. 테리 연구원은 약 10년에 걸쳐 고가의 가방·의류, 고액의 현금 등을 제공받은 대가로 한국 정부에 미국의 비공개 정보를 넘겨온 혐의 등을 받고 있다. 이날 검찰은 테리를 기소하면서 동맹국인 한국의 정보 당국이 깊게 연계됐다고 이례적으로 상세하게 공개했다. 미국의 안보 이익을 침해한 한국 정부에 ‘경고성’ 메시지를 보낸 것 아니냐는 관측과 함께 이번 사건의 여파가 한미 관계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본지가 입수한 뉴욕 남부지검 공소장에 따르면, 검찰은 공소장에 “테리가 한국 정부의 요원(agent)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 활동했다”고 적었다. 이에 따르면 테리 연구원은 2013년부터 최근까지 10여 년간 워싱턴 DC 및 뉴욕에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된 고위급 한국 국가정보원 요원 세 명과 만나 비공개 정보 등을 건네고 한미 정부 관계자들 간 모임을 주선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 대가로 명품 브랜드 핸드백·옷 및 3만7000달러(약 5100만원)가량의 뒷돈을 받았다고 검찰은 밝혔다.

지난 2020년 8월 수미 테리(왼쪽) 연구원이 뉴욕 맨해튼의 고급 식당에서 한국 국가정보원 고위 간부 두 명과 식사하고 있는 모습. NIS는 '국정원' 'Handler(핸들러)'는 '담당자'라는 뜻이다. /미 연방검찰 공소장

미 검찰은 테리를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FARA는 외국 정부·정당·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홍보하는 사람은 미 법무부에 등록하고 그 활동을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테리는 이 규정을 알고서도 고의로 지키지 않았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다. 테리와 그의 변호인은 “근거 없는 왜곡”이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미 검찰은 테리가 3450달러짜리 루이비통 핸드백과 2845달러가량의 돌체앤가바나 코트, 3만7000달러가량의 뒷돈 등을 받고 한국의 이익을 위해 활동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국정원 요원들이 테리를 위해 명품 가방을 직접 고르고 선물한 뒤 대사관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을 타고 함께 떠나는 사진 등도 공개했다. 공소장을 보면 미 수사 당국은 테리와 국정원 간 관계를 10년간 추적해 오면서 그들 간의 대화나 통화 등을 실시간 도·감청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21년 4월 미 워싱턴 DC 주미 대사관 외교관 신분으로 나온 국정원 요원이 수미 테리 연구원에게 선물하기 위해 3450달러 상당의 루이비통 핸드백을 구매하고 있는 모습. /미 연방검찰 공소장

테리와 국정원 간 첫 교류는 그가 CIA를 떠난 지 5년 뒤인 2013년 시작됐다. 공소장에 따르면, 주(駐)뉴욕 유엔 한국대표부 외교관(공사)으로 가장한 국정원 고위 요원과 처음 만난 테리는 2016년까지 이 국정원 요원과 지속적으로 교류해 왔다고 한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2014년 테리를 소환해 국정원과의 관계에 대해 경고했다. 테리는 ‘알겠다’고 답했지만 이후에도 국정원 요원들에게 정보 등을 제공하고 금품을 수수했다고 미 검찰은 밝혔다.

공소장에 적힌 국정원의 ‘접대’ 내역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국정원 직원은 2019년 11월 13일 테리와 동행해 메릴랜드주의 한 매장에서 돌체앤가바나 코트를 사줬다. 테리는 이틀 뒤 돌체앤가바나 코트를 환불하고 차액은 본인이 지불하는 방식으로 4100달러짜리 크리스챤 디올 코트를 구매했다. 같은 날 워싱턴 DC의 다른 가게에서도 보테가 베네타 가방을 구매했다. 2020년 8월엔 미 정부 인사들도 참여한 화상 워크숍을 주선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고급 핸드백을 구매해서 뉴욕 맨해튼의 고급 그리스 식당에서 전달했다. 이듬해 4월에도 테리와 함께 워싱턴 DC의 루이비통 매장에 들러 3450달러짜리 핸드백을 사줬다. 검찰은 이에 앞서 같은 해 1월 테리가 국정원 고위층과 미 국방부 당국자 등과의 회동을 주선했다고 적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코트와 가방을 사줬음을 시사한 것이다. 공소장엔 현장을 찍은 여러 사진이 함께 첨부됐다.

지난 2021년 4월 미 워싱턴 DC 주미 대사관 외교관 신분으로 나온 국정원 요원이 3450달러 상당의 루이비통 핸드백을 구매한 뒤 수미 테리(왼쪽) 연구원이 자리를 뜨는 모습. 미 검찰은 공소장에서 "이들은 대사관 번호판이 붙어있는 차량을 함께 타고 떠났다"고 했다. /미 연방검찰 공소장

테리는 2022년 6월 토니 블링컨 미 국무 장관과의 비공개회의에서 나온 미국 정부의 대북 정책 관련 비공개 메모를 한국 정부에 전달한 혐의도 받고 있다. 언론 보도 및 외부 유출이 불가능한 ‘오프더레코드’를 전제로 한 대화 내용이었음에도 회의 직후 한국 정부에 넘겼다.

FARA의 골자는 테리처럼 다른 나라의 이권을 위해 일한다면 로비스트 격인 ‘외국 대리인’으로 법무부에 등록하고 활동하라는 것이다. 등록을 하면 ‘전업 로비스트’가 되는 셈이기 때문에 테리가 지금의 직업인 연구원 등을 겸업할 수는 없다. FARA를 위반할 경우 형량은 최대 5년의 징역 혹은 최대 25만달러의 벌금이다. 적(敵)의 성공을 위해 일하거나 국방 관련 정보를 보유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혐의 등에 적용되는 간첩법은 최대 사형까지도 가능하지만, FARA보다 훨씬 까다롭게 적용된다.

미 정부가 한국에 정보를 넘겼다며 처벌한 과거 사례 중엔 ‘로버트 김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1996년 미 해군 정보국에서 정보분석관으로 일하던 재미 교포 로버트 김이 주미 한국 대사관 소속 무관(武官) 백모 대령에게 북한 잠수함 강릉 침투 사건 관련 정보를 알려줬다가 징역 9년에 보호감찰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로버트 김은 현직 미 공무원 신분이었고 넘긴 정보가 국방 관련이었다는 점이 테리 사건과는 다르다.

한국계 이민자 출신인 테리는 하와이와 버지니아에서 컸다. 2001~2008년 CIA 수석 분석가로 일했고 이후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에서 한·일·오세아니아담당 국장을 지낸 후 정책 연구소에서 주로 근무했다. 탈북민 일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유토피아를 넘어서’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FARA(외국대리인등록법)

’Foreign Agents Registration Act’의 준말. 외국인을 포함해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이 외국 정부·기관·기업 등의 정책 및 이익을 위해 일할 경우 미 법무부에 신고하고 활동도 보고하도록 하는 연방 법이다. 미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활동을 투명하게 파악하겠다는 취지로 제정돼 1938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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