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8일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피서브 포럼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수락 연설에서 연설하고 있다. 지난 13일 펜실베이니아주 유세에서 총격 사건으로 숨진 소방관 출신 코리 콤페라토레의 헬멧과 소방복을 안고 있는 모습. /로이터 뉴스1

“미국인의 절반만을 위한 승리라면 그건 승리가 아닙니다. 미국인으로서 우리는 하나의 운명, 공동의 운명으로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어나야 합니다.”

나흘간 열린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인 18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트럼프(TRUMP)라고 쓴 황금빛 조명이 번쩍이는 가운데 무대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이어진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불화와 분열을 빨리 치유하자”며 ‘하나의 미국’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전당대회장인 ‘파이서브 포럼’에 모인 약 5만명의 지지자들은 “유에스에이(USA·미국), 유에스에이!”라고 소리쳤다. 트럼프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는 듯 감격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적(政敵)을 지지한 국민도 포용하겠다’는 메시지는 흡사 대통령 취임사를 연상케 했다.

트럼프가 13일 펜실베이니아주 야외 유세 중 발생한 총격 이후 대중 연설에 나선 건 이날이 처음이다. 그는 총 맞아 다친 오른 귀를 거즈로 감싸고 무대에 섰다. 수락 연설은 미 정치 역사상 최장인 1시간 32분 동안 이어졌다.

트럼프는 이날 조 바이든 정부에 대한 비판과 불법 이주자들,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연설을 관통하는 주요 메시지는 통합과 화합이었다. 분노와 증오로 얼룩졌던 과거 두 차례(2016·2020년) 대선 후보 수락 연설과 비교하면 훨씬 부드러워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적어도 이날 밤엔 공개적인 위협과 적나라하고 악의적인 비난을 찾아볼 수 없었다”며 “측근들에 따르면 트럼프에게 ‘절제’라는 새 능력이 생긴 것은 유세에서 죽을 뻔했던 경험의 결과”라고 전했다. 트럼프는 “나는 믿음과 헌신으로 여러분의 미국 대통령 지명을 자랑스럽게 수락한다. 남녀노소, 민주당, 공화당, 무소속, 흑인, 백인, 아시안, 히스패닉 등 모든 시민 여러분께 충성과 우정의 손길을 내밀어 드린다”고 했다. 트럼프는 연설 시작 몇 시간 전까지도 직접 표현을 다듬고 연습했다고 한다.

공화당 대선 캠프 관계자는 “총격 사건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며 “대선 승리를 위해선 최대한 많은 사람을 품고 보듬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고 했다. 이날 연설 때 트럼프는 평소보다 느릿한 말투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고 연설 도중 지지자들을 향해 수차례 온화하게 웃기도 했다. NYT는 “공화당은 트럼프를 헌신적인 할아버지, 배려심 많은 친구, 자비로운 지도자로 다시 설정하는 데 많은 노력을 했다”고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8일 공화당 전당대회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2016년 ‘정치 신인’이었던 트럼프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중·서부 러스트벨트(제조업 쇠퇴 지역)에 사는 저학력 백인 남성들의 ‘분노’를 끌어내려는 발언을 쏟아냈었다. 워싱턴 DC의 정치인들을 ‘도둑놈들’이라고 욕했고 상대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부패한 인간”이라고 깎아내렸다. 2020년 재선을 노릴 땐 바이든을 향해 “미국의 위대함을 파괴하는 자”라고 했다. 그러나 18일 트럼프는 11월 맞붙을 바이든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최소화했다. 미 매체 액시오스는 “바이든이 민주당 내에서도 고령(高齡) 논란에 오른 상황이었는데도 트럼프는 일절 언급을 안 했다. 상대에 대한 공격을 자제했다”고 했다. 바이든에 대한 언급은 “미국 최악의 대통령 열 명을 더한 것보다 바이든이 더 큰 해악을 끼쳤다. 바이든 얘기는 이제 안 하겠다”라는 한 차례가 전부였다.

그래픽=박상훈

트럼프가 “정치가 우리를 너무 자주 분열시키는 이 시대에 우리 모두는 자유와 정의감을 가진 동료 시민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하자 6층 기자석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던 현장 기자 사이에 “트럼프가 멀쩡한 대통령 같은 연설을 하다니, 정말 오랜만에 보는 장면”이란 말이 나왔다. 워싱턴포스트는 “불같이 화를 내며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수사로 유명한 트럼프식 연설은 이날 없었다. 이토록 느리고 낮은 어조는 트럼프에겐 이례적”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불과 며칠 전 귀에 총을 맞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는 떠올리기 싫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그는 “사방에 피가 흘렀지만 나는 매우 안전하게 느꼈다. 하나님이 내 편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총격으로 쓰러졌다 두 다리로 다시 일어서 주먹을 흔들어보이는 사진이 대회장 대형 화면에 비춰지자 지지자들이 “싸우자(Fight)”라고 여러 차례 외쳤다. ‘싸우자’는 트럼프가 총에 맞아 피신했다가 다시 일어서며 외친 말이다.

이날 전당대회는 정치 행사라기보다 록 스타의 콘서트처럼 느껴졌다. 미국 프로레슬링의 ‘전설’ 헐크 호건은 트럼프에 앞서 성조기를 흔들면서 무대로 나와 지원 연설을 했다. 그가 검은 티셔츠를 양손으로 찢어 갈기고 ‘트럼프-밴스(부통령 후보 J.D. 밴스)’라고 쓴 붉은색 민소매 셔츠가 드러나자 지지자들은 환호했고 자리에서 일어난 트럼프도 치아를 보일 정도로 큰 함박웃음을 지었다. 유명 로커 키드 록이 공연을 하면서 ‘싸우자’를 외치기도 했다. CNN은 “이날 행사는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으로 가득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는 이민, 총기, 남미의 조직폭력배 이야기 등 여러 주제를 즉흥적으로 오가면서 물 한 번 마시지 않고 1시간 32분간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정해진 연설문을 띄우는 텔레프롬프터가 수차례 멈추는 일도 있었다. 소셜미디어에선 “저녁만 되면 잠에 들어야 하는 바이든과 대조된다”며 바이든과 트럼프의 체력을 비교한 글들이 잇따라 올라왔다. 82세인 바이든은 78세인 트럼프보다 불과 네 살 많지만 체력·활력 차이는 이보다 훨씬 커 보였다.

트럼프가 이날 ‘길지만 비교적 순화된 연설’을 한 것을 두고 미 언론들은 “총격 사건 이후 어느 때보다 단단해진 당내 기반을 바탕으로 중도층 표심을 본격적으로 노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이런 기조를 끝까지 유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전망이 많다. 지지율이 떨어질 조짐이 보이면 트럼프가 자신의 ‘특기’를 살려 당내 강성층의 결집을 위해 발언 수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한 시간 정도 차분한 어조를 유지하던 트럼프는 연설 후반부로 향해 가면서 불법 이주자 유입, 중국 기업의 자동차 수출, 인플레이션 등 바이든 정부의 실정을 비난하며 때때로 고성을 질렀다.

한편 이날 전당대회엔 트럼프 일가족이 총출동했다. 이번 대선 기간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멜라니아 여사도 붉은색 투피스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트럼프는 “이 여정에 나의 멋진 아내 멜라니아와 함께하게 돼 큰 영광”이라며 “미국에 국민 통합을 촉구하는 아름다운 글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했다. 트럼프 총격 직후 멜라니아는 성명을 내고 “용기와 상식을 일으켜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했었다.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장남 도널드 주니어 부부와 딸 이방카, 막내 배런 등 10명의 자녀 및 손자, 손녀 이름을 일일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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