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건 리(한국이름 이명원) 파나소닉 북미법인 대표. /파나소닉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듯했던 내 인생이 아이 둘을 낳고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흑백 영화가 컬러 영화가 됐어요.”

매건 리(62·한국 이름 이명원) 파나소닉 북미법인 대표는 지난 10일 본지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씨는 법무팀 비서로 커리어를 시작, 36년 동안 일본을 대표하는 다국적기업 파나소닉에서 ‘최초의 최초’ 기록을 써 내려가며 한국계 여성으로는 드물게 북미 최고경영자(CEO)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지난 4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의 국빈 방미(訪美) 때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주재한 백악관 만찬에 참석한 유일한 한국계로도 주목받았다. 이런 이씨가 자신이 성공한 비결이자 인생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두 자녀와 육아를 꼽은 것이다.


◇ 현모양처 꿈꾸던 이대생… 파나소닉 北美수장으로

매건 리 파나소닉 북미법인 대표(가운데)가 올해 5월 CECP(기업 목적을 위한 최고경영자 협회)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해있다. /X(옛 트위터)

이씨는 이화여대에서 생활미술을 전공했다. “스스로 재능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했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며 “교수 부인이 돼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현모양처가 꿈이었다. 결혼도 선을 봐서 갔다”고 했다. 그러던 중 첫째 아이를 낳고, 1987년 은행 주재원 발령을 받은 부친을 따라 로스앤젤레스(LA)로 가면서 이씨의 삶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첫 아이 출산 후 2~3주 됐을 때 취직 제안을 받아 파나소닉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씨는 고사했지만 모친의 권유가 있었는데 “모친의 호랑이 같았던 강인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씨에게는 87년생 아들, 92년생 딸 두 자녀가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 최고의 이벤트는 유명 인사들이 즐비했던 백악관 만찬에 초청받은 것도, 3년 전 파나소닉 CEO 자리를 제안 받은 것도 아니었다. 이씨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큰아들, 둘째딸을 낳을 때가 선명하게 기억난다”며 “그게 내 인생 최고의 이벤트였고, 심지어 MBTI까지 출산으로 인해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했다. “무한한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이 생겼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고, 아이가 세상을 나왔을 때 “이 아이는 미국 대통령이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에 세상의 모든 기회를 다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씨는 “적어도 대학교 때까지는 돈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월급도 더 받아야 한다는 마음에 일을 참 열심히 했다”고 했다.


◇ “희생하는 엄마? 행복한 엄마!… 자기존중이 중요”

매건 리 파나소닉 북미법인 대표(오른쪽)와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링크드인

이씨에게 있어 가장 큰 동기부여이자 원동력이 두 자녀였던 셈이다. 이씨는 ‘아이를 키우는 기쁨’에 대해 말하며 “직장에서 잘 나가는 기쁨과 엄마로서의 기쁨은 도저히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마 100배, 아니 1000배는 더 클 것”이라고 했다. 2007년 이혼한 이씨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아이들을 홀로 키워야 했다. 직장 생활과 병행하느라 충분한 시간을 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희생하는 엄마보다 행복한 엄마가 아이들에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이씨의 지론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 딸 친구 엄마로부터 ‘일을 하는 엄마이면서 아이들에게 미안하지 않냐’는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며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지만 나도 굉장히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후회하며 자책하지는 않으려 한다”고 했다.

이씨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스스로 자책하지 않고, 매일 매일 스스로와 대화하고 위로를 건네는 ‘자기 존중’이 중요하다”고 했다. 커리어와 육아·출산 사이에서 고민하는 20~30대에게는 “균형 잡기는 어려운 문제가 맞지만, 각오가 돼 있다면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는 게 인생에서 결코 후회하지 않을 일”이라고 했다. 재밌는 점은 이씨의 두 자녀는 당장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씨는 “각자의 세계관이 있으니 강요할 생각이 없다”면서도 “내가 했던 찐한 경험을 했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미국에서도 종종 회자될 정도로 익히 알려져 있는데 “너무 비싸지도 않은 적당한 가격이면서 좋은 품질의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데이케어(Affordable Day Care)’가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년 정도는 육아에 집중하고 어쩔 수 없이 직장일에 몰두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는데 주변의 배려를 받을 수 있어 운이 좋았다”고 했다.


◇ 경력 단절 여성에 “레주메 빌딩·전략적 네트워킹” 조언

매건 리 파나소닉 북미법인 대표가 지난 10일 본지와 화상 인터뷰를 하고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60줄에 접어든 이 대표의 ‘인생 2막’ 목표는 한국과 미국에서 아이디어 하나 갖고 사업에 뛰어드는 예비 여성 기업인들을 위한 멘토가 되는 것이다. 특히 ‘경력 단절’에도 관심이 많아 실리콘밸리 등에서 한인 여성의 재취업 지원을 위한 여러 활동을 펼쳐왔다. 30년 넘게 인사(HR)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이씨의 조언은 이랬다. “요즘은 레주메(이력서)를 고르고 뽑아 내는 과정이 거의 자동화돼 있기 때문에 공들여 제대로 쓰지 않으면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모두가 신망하는 C레벨(최고 임원급)까지 올라갔지만, 이런 이씨도 “네트워킹과 스몰 토크는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그는 “진짜로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략적 네트워킹’의 중요성을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체감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