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서로를 ‘자매’라 부르며 지지고 볶았던 이들이 미국 역사상 첫 여성 흑인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똘똘 뭉치기로 했다. 미국 대학 흑인 사교 클럽 9개 연합 ‘디바인 나인(Divine Nine·신성한 아홉)’ 얘기다. 액시오스는 24일 “노예 해방 한 세대 후 폭력의 위협 속 결성된 이 단체들이 흑인 여성(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출마한 대선을 역사적인 이정표로 여겨 전례 없는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CNN은 “이 자매들(sisters)이 해리스의 비밀 병기”라고 했다. 해리스는 어머니가 인도인이지만 아버지는 자메이카 출신 흑인이다. 해리스는 24일 인디애나주의 한 사교 클럽 모임을 찾아 “나는 여러분의 지지를 바탕으로 미국의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했다.
◇ 흑인 지도자 배출 요람… 해리스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
미국 사회에는 같은 취미와 생각, 철학을 공유하는 사교 클럽이 활성화돼 있다. 대학의 경우 프래터니티(Fraternity·남학생 사교 클럽)와 소로리티(Sorority·여학생 사교 클럽)가 대표적이다. 중세 시대 종교 모임에 뿌리를 둔 사교 클럽은 19세기 중반부터 미국 내 대학에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보통 그리스 알파벳 3개 정도를 조합해 이름을 짓는다. 회원들끼리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고 숙식을 같이하는데 때론 문란한 파티로 말썽을 빚기도 한다.
워싱턴DC의 유서 깊은 흑인 대학 하워드대를 졸업한 해리스도 재학 중이던 1986년 ‘알파 카파 알파’라는 이름의 소로리티에 가입했다. 해리스는 “자매애(sisterhood)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소로리티 생활을 자랑스러워했다. ‘알파 카파 알파’는 1908년 만들어진 최초의 흑인 소로리티이고, 이보다 2년 전엔 코넬대에서 ‘알파 파이 알파’라는 흑인 프래터니티가 처음 만들어졌다. 이렇게 흑인 대학 사교 클럽이 속속 생겨나면서 1930년 8곳이 뭉쳐 협의회를 결성했고, 1963년 모건주립대의 ‘이오타 파이 세타’까지 합류해 오늘날 ‘디바인 나인’의 원형이 갖춰졌다. ‘디바인 나인’의 회원 대부분이 민주당원이다. 이 단체는 바이든 퇴진 다음 날인 22일 낸 성명에서 “전례 없는 유권자 등록·교육·동원 캠페인을 통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겠다”고 밝히며 강력한 선거 캠페인을 예고했다.
◇ 200만 회원 정치 파워, 2008년 오바마 당선시킨 주역
해리스가 소로리티에 가입한 1986년은 흑인 사교 클럽이 아시아계·라틴계에 문호를 개방하며 다문화 조직으로 외연을 확장하려던 시기다. 해리스가 부통령, 상원 의원 등 주요 선거에 출마할 때마다 사교 클럽 회원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독려하는 등 큰 도움을 받았다. 해리스가 몸담았던 ‘알파 카파 알파’는 바이든 퇴진 이틀도 되지 않아 150만달러(약 21억원)를 모았다고 밝혔다. 20세기 들어서도 흑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지속되면서 흑인 사교 클럽은 단순한 친목 단체 이상의 역할을 했다. 액시오스는 “과거 노예였던 사람들의 자녀·손주들이 린치에 맞서 민권운동을 이끌었고, 인종차별에 도전했으며, 지역 경제·의료 서비스·교육을 개선한 흑인 지도자들을 배출했다”고 했다.
도합 2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흑인 사교 클럽 출신들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갖춘 흑인 중산층으로 세를 규합해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민권운동의 상징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 흑인 최초의 연방 대법관 서굿 마셜, 하원에서 17선을 한 존 루이스, 조 바이든 대통령 퇴진을 설득한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등이 ‘디바인 나인’ 출신이다. 2008년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흑인 유권자의 몰표를 받은 것도 ‘디바인 나인’ 출신들의 조직적인 투표 독려 캠페인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