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팔 창업자이자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투자자인 피터 틸. /X(옛 트위터)

오하이오주 ‘흙수저’ 출신 J.D 밴스 상원의원의 공화당 부통령 후보 지명과 함께 주목받는 인물이 한 명 있다. 페이팔 창업자이자 ‘스타트업 성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성공한 투자자라 불리는 피터 틸(56)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독점적 이익을 구축하라는 이른바 ‘제로 투 원(Zero to One)’을 외쳐온 틸은 페이스북, 에어비앤비, 팔란티어, 리프트, 딥마인드, 스포티파이, 스페이스X 등에 투자해 100억 달러(약 15조2500억원)가 넘는 자산을 일궜다. 성공 사례를 헤아리기 어렵다.


◇ 밴스, 틸 강연 들은 뒤 “가장 중요한 순간”

그런데 11월 대선을 앞두고 이뤄진 틸의 베팅은 특히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틸이 단순히 밴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큰돈을 후원해 온 것을 넘어 두 사람이 오랜 기간 어떤 철학과 세계관을 공유해온 사이이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28일 한 소식통을 인용해 “피터에게 밴스는 세대를 뛰어넘는 베팅”이라며 “최근까지 워싱턴을 기피했던 틸 네트워크의 벤처 자본가들은 새로운 자산인 밴스를 백악관에 두게 됨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밴스가 부통령으로 지명된 직후 틸의 한 사업 파트너는 X(옛 트위터)에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의 백악관에 전직 벤처캐피털리스트(VC)가 있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틸과 밴스의 관계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 복무 후 예일대 로스쿨에 재학 중이던 밴스는 틸의 강연을 듣게 된다. 그때도 거물이었던 틸은 ‘기술의 정체’를 한탄하며 “경쟁이 치열한 일자리에 대한 엘리트들의 집착이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밴스는 이를 “대학원 재학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 표현한다. 틸을 “내가 만난 아마도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 했고, 법학 이외 분야로도 진로를 전환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졸업 후 한동안 로펌 변호사로 일하다 서부로 이동, 틸의 벤처캐피털 회사인 미스릴 캐피털로 이직해 VC로 변신한다. 이 회사 출신으로 훗날 밴스와 동업하게 되는 콜린 그린스펀은 “틸 네트워크의 장점은 항상 흥미로운 사람이 오고 간다는 점인데, J.D는 우리가 가까이 두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우리 네트워크에 100%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 틸, 밴스를 트럼프에 소개하고 역대급 후원도

공화당 부통령 후보인 J.D 밴스 상원의원이 27일 미네소타주 유세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뉴스1

WP는 “틸이 밴스의 꽤 좋은 멘토가 됐다”고 했다. 밴스는 틸의 회사에 있으면서 기술 혁신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추앙받는 분위기에 익숙해졌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투자자들이 기업을 평가하는 방식을 익혔다. 오하이오주 미들타운 출신의 ‘힐빌리(저소득 백인 노동자에 대한 멸칭)’였던 밴스가 억만장자들과의 저녁 만찬 자리를 다니며 또 다른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이 시기다. 오늘날의 밴스를 있게 한 회고록이자 베스트셀러 ‘힐빌리의 노래’도 이때 출판됐다. 밴스와 교류했던 실리콘 밸리의 인사들 사이에선 평가가 엇갈린다. 한 인사는 “밴스가 자신의 정치적 야망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고, 주목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비슷한 배경의 사람보다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끌렸다”고 했다.

2016년만 하더라도 트럼프를 ‘히틀러’에 비유했던 밴스는 2021년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출마를 발표할 무렵에는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공화당원으로 변신해 있었다. WP는 “이는 틸과 수년 간의 대화를 한 결과”라고 했다. 틸은 2016년 대선에선 트럼프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 중 한 명으로 전당대회에서 찬조 연설까지 했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는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이듬해 밴스를 마러라고에 데려가 트럼프에 소개했다. 틸의 정치 성향은 공화당 지지자이면서도 동성애 등을 옹호하는 ‘자유지상주의’로 분류된다. 틸 본인이 커밍아웃을 한 게이다. 그의 후원 이력을 보면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 로 칸나 하원의원 등 민주당 인사들에도 기부를 했던 점이 흥미롭다.


◇ 사업적 이해관계 때문?… 아님 더 큰 그림 있거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6년 12월 당선 직후 뉴욕 트럼프타워에서 실리콘밸리 IT업계 인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트럼프 바로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피터 틸 페이팔 공동창업자다. /AFP 연합뉴스

틸은 2022년 중간 선거를 앞두고 밴스의 선거 캠페인에 1500만 달러(약 208억원)를 기부했다. 밴스가 단일 상원 후보로는 역대 최대 금액의 모금을 한 것인데, 틸이 본인 뿐만 아니라 데이비드 색스 같은 다른 실리콘밸리 거물들의 후원도 주선했다고 한다. 2019년 밴스가 본인의 벤처캐피털을 설립할 때도 틸이 상당한 자본금을 댔다. CBS는 “기술 분야 고액 기부자들이 밴스의 부상에 필요한 로켓 연료를 제공했다”며 “가장 눈에 띄는 후원자는 틸”이라고 했다. 틸이 밴스에 투자한 반대 급부로 무엇을 원하는 지는 해석과 추측의 영역이다. 일각에선 틸이 큰돈을 투자한 팔란티어·안두릴 등이 많게는 수조원의 연방 정부 사업을 따내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업적 이해 관계’를 지목하기도 한다.

기술과 과학을 이용해 인간의 진보를 추구할 수 있다는 이른바 ‘테크노 자유주의’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틸이 오랜 기간 옹호한 것으로 알려진 개념인데, 실리콘밸리 문법을 이해하는 밴스가 기술 산업을 늘 두들겨 맞는 ‘정치적 샌드백’에서 ‘자본주의 엔진’으로 바꾸는 데 앞장설 “설득력 있는 특사”(WP)라고 본다는 것이다. 역시 틸 네트워크 출신으로 2년 전 애리조나주 하원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던 블레이크 마스터스는 “앞으로 닥쳐올 문제를 거의 직관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고, 결코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라며 “(핵무기를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와 같은 대규모 이니셔티브를 수행하던 정부가 이제는 더 이상 만들지 못하는 새로운 기술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