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왼쪽)과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 / AFP 연합뉴스

미국 우파 진영을 대표하는 헤리티지재단이 발표한 정책 제언집이 11월 미국 대선을 3개월여 앞두고 돌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워싱턴 정가에서 ‘트럼프 2기 공약집’으로 받아들여졌던 정책집에 대해 민주당 진영이 잇따라 ‘극우 로드맵’이라며 공세 수위를 높이면서다.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우리와 관계없는 문건”이라며 거리두기에 나서자 정책집 실무 책임자가 30일 사퇴하는 등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미 언론들은 “후보 캠프가 아닌 외곽 연구소 문건이 미 대선의 핵심 논쟁 거리가 된 건 이례적”이라고 보도했다.

◇헤리티지에 무슨 일이

미 대선 국면에서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이 문건은 미국 보수의 핵심인 헤리티지재단이 ‘프로젝트 2025′를 통해 차기 보수 정권용으로 만든 900쪽짜리 정책 제언집 ‘보수의 약속(The Conservative Promise)’이다. ‘프로젝트 2025′는 보수 정부의 재집권에 대비해 미리 정책을 만들고 사람을 키우자는 취지로 2년 전 출범했다. 트럼프가 재선 이후 행정부를 빠른 속도로 장악하기 위해 언제든 대통령이 발탁할 수 있는 인재 목록도 구축하고 있다. 헤리티지재단을 중심으로 80여 개 싱크탱크가 참여하고 있다. 특히 전직 트럼프 정부 고위 관료들이 상당수 참여해 사실상 트럼프의 의중을 반영한 공약집이라는 평가가 우세했다. 친트럼프 진영에서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었다.

미국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헤리티지재단의 케빈 로버츠(58) 회장. 사진은 로버츠 회장이 작년 4월 헤리티지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헤리티지재단

기류 변화가 감지된 건 민주당이 이 정책집에 대해 공세 수위를 대대적으로 높인 직후다. 발단은 헤리티지재단의 케빈 로버츠 회장의 발언이었다. 로버츠는 지난 2일 트럼프의 ‘책사(策士)’로 불렸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워 룸(war room)’에 출연해 “현재 2차 미국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며 “좌파가 (이 혁명을 방해하지 않고) 허락한다면 ‘무혈 혁명(bloodless)’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5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입은 2021년 1월 6일 미 연방의사당 난입 사건을 연상시키는 공격적인 그의 발언은 민주당 지지층 사이에서 “트럼프 진영이 또 다시 폭력 혁명을 꿈꾸고 있다”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민주당 진영은 재빠르게 이 논란을 정치 쟁점화했다. 로버츠가 총괄하고 있는 프로젝트 2025가 극우 정책으로 가득차 있다며 이를 바탕으로 트럼프 공격에 나선 것이다. 민주당은 이 제언집이 2기에서 현실화되는 걸 저지하겠다며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고,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서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도 프로젝트 2025를 전면에 앞세우면서 트럼프 정책 비판에 나섰다.

해리스는 지난 23일 바이든 사퇴 이후 주요 경합주인 위스콘신에서 첫 야외 유세를 갖고 “트럼프와 그의 극단적인 프로젝트 2025는 중산층을 약화할 것”이라고 했다. 대선을 3개월여 앞두고 대선 결과를 좌우할 경합주의 부동층 공략을 위해 트럼프 진영의 ‘극단성’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으로 분석된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해리스 부통령은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 도널드 트럼프와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프로젝트 2025에 반대할 것”이라며 측면 지원에 나섰다.

특히 민주당 진영이 프로젝트 2025의 ‘공격 포인트’로 내세우는 건 이번 대선의 최대 이슈 중 하나인 낙태 정책이다. 이 제언집은 ‘미 전역에서 낙태 및 피임약 복용 전면 금지’를 주장하고 있다. 미 언론들은 “대다수 여성 및 중도층들이 반감을 가질 수 있을만한 극단적 제안”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는 트럼프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다. 트럼프는 낙태권과 관련해 “각 주(州)에서 결정할 문제”라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다른 어떤 이슈보다도 휘발성이 강한 낙태 문제는 2022년 중간 선거때도 ‘레드 웨이브(공화당 압승)’을 막아선 주요 원인이었다. 이를 의식한 트럼프가 낙태 문제에 있어서 공화당 강성 지지층과 달리 유연한 입장을 선택한 것이란 평가가 나왔었다.

◇트럼프 진영 “우리는 모르는 일” 선 그었지만…

민주당의 공세에 트럼프 진영은 재빠르게 선을 그었다. 트럼프는 지난 5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나는 프로젝트 2025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누가 그 뒤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어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것 일부는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이 말하는 것 중 일부는 완전히 터무니없고 끔찍하다”고도 했다.

트럼프의 참모들도 잇따라 “캠프와는 관계없는 외부 단체의 ‘위시리스트’ 일 뿐”이라고 혹평했다. 트럼프 캠프의 가시 돋친 반응에 대해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 등은 “내부적으로도 트럼프의 정책이 극단적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지는 건 경계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논란이 커지자 헤리티지는 “우리는 특정 후보가 아닌 보수 정권 재창출을 위해 정책을 준비할 뿐”이라고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당황한 분위기다. 프로젝트 2025엔 트럼프 1기때 백악관에서 근무했던 100여명 이상의 전직 고위 관리들과 보좌관들이 상당수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백악관 예산관리국장이자 현 공화당전국위원회(RNC) 정책국장인 러셀 보트, 전 백악관 이민당담 수석보좌관인 스티븐 밀러 등이 프로젝트 2025에 참여했다. CNN은 140여명의 트럼프 행정부 관료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트럼프의 최측근 보좌관이었던 존 매켄티는 “프로젝트 2025의 여러 작업이 트럼프의 선거 캠페인에 통합될 것”이라고도 했었다.

낙태·피임 문제 등을 제외하고 프로젝트 2025가 제안하는 대규모 감세, 불법 이민자 추방, 관료제 유연화 등 정책은 실제 트럼프 캠프가 공개한 공약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분석도 많다. 워싱턴DC의 한 소식통은 “사실상 트럼프 진영과의 교감하에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이렇게 무시당하자 좌절을 느끼는 직원들도 있다”고 전했다.

헤리티지재단의 프로젝트 2025 총 책임자인 폴 댄스가 30일 사의 의사를 밝혔다. 변호사 출신으로 트럼프 정부 1기 때 연방인사관리처(OPM) 수석보좌관, 주택개발부 선임고문을 지냈다. 1·6 의회 습격 사태 이후에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옹호하고 곁을 지켜온 트럼프의 측근 중 한 명이다. /헤리티지재단

급기야 트럼프 측근인 폴 댄스(Dans) 프로젝트 2025 총괄 디렉터는 이날 사의를 표명했다. 댄스 디렉터는 변호사 출신으로 트럼프 정부 1기 때 연방인사관리처(OPM) 수석보좌관, 주택개발부 고문을 지냈다. 대선에 불복한 지지자들이 2021년 일으킨 ‘1·6 의회 습격 사태’ 이후에도 트럼프를 옹호하고 곁을 지킨 충성파 측근으로 꼽히지만 이번 논란에 책임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우파 성향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민주당이 트럼프 공격을 위해 프로젝트 2025에 대한 비판 수위를 지나치게 높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WSJ은 최근 사설에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할 경우) 그는 일관된 정책 가이드를 가진 ‘전략가’라기보다는 즉흥적인 ‘전술가’로서 나라를 통치하게 될 것”이라며 “그는 (프로젝트 2025와 같은 잘 정리된 정책집이 아닌) 일시적인 뉴스 사이클에 따라,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사람의 의견에 다라 정책을 짜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어 “민주당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정책이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프로젝트 2025를 (과도하게) 공격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