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환 전 국가정보원 대구지부장.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 군무원의 블랙 요원 기밀 유출을 놓고 더불어민주당이 조태용 국정원장 경질을 요구한 가운데, 하동환(57) 전 국정원 대구지부장은 4일 본지 인터뷰에서 “수사권을 빼앗아 간첩 수사를 못 하게 손발을 묶은 민주당이 이제 와서 국정원 책임을 묻겠다며 생떼를 쓰는 건 어불성설”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하 전 지부장은 2년 전 퇴직 전까지 약 30년을 국내외 방첩 전선을 넘나들었고 지하혁명조직(RO), 왕재산 간첩단 등 굵직한 공안 사건을 담당했던 대공 수사 베테랑이다. 지난달 미국 워싱턴DC를 찾은 그는 “간첩 사범 앞에 사법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자국 정보기관을 이렇게 악마화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 野, 수사권 이어 조사권 박탈까지… “손발 묶어놓고 생떼”

문재인 정부는 2020년 12월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국정원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지난달엔 전대협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이기헌 의원 등 17명이 대공 조사권을 박탈하는 법안도 발의했다. 하 전 지부장은 민주당 정보위원들이 조 원장 경질을 요구한 것에 대해 “방화범이 큰소리를 치는 격”이라 했다. “예전의 국정원이라면 블랙 요원 기밀 유출을 놓고 배후 세력과 범행 전모를 모두 밝혀냈겠지만, 수사권이 박탈된 이상 불법을 감수하면서까지 간첩 혐의자들의 증거를 찾아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명단 유출 배후는 100% 북한의 대남공작 부서라 확신한다”면서도 “범죄 혐의를 확인하려면 이메일 감청, 휴대전화 위치 추적, 통화내역 확보 등을 할 수 있는 수사권이 필수인데 이런 권한이 없으니 신속하고 정확한 혐의 입증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 전 지부장은 문재인 정부에서 각각 국정원장과 1차장을 지낸 민주당 박지원·박선원 의원 실명을 거론하며 “과연 이런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나”라고 했다.

간첩 사범 수사·검거·재판에 있어 “정상적인 사법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도 했다. “간첩 사범이든 일반 형사사범이든 똑같이 구속 기간 6개월을 적용하는데 최근 검거된 간첩단 피의자들이 국민참여재판 신청, 재판부 기피, 법관 고발, 위헌법률심판 신청 등 각종 지연 전략을 구사하며 모두 석방됐다”는 것이다. 하 전 지부장은 “석방된 혐의자들이 증거 인멸, 범행 은폐 등을 위해 말 맞추기를 한다”며 “간첩들에 한없이 관대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 일부 국가의 경우 국가 체제를 위협하는 간첩 사범에 일체 관용이 없고, 별도의 전문 재판부를 두기도 한다”며 “범죄 행위의 실체적 진실 규명이 사법부의 본질적 의무이기 때문에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간첩 사범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판결하겠다는 취지”라고 했다.


◇ “자국 정보기관 이렇게 악마화하는 나라 없어”

조태용 국가정보원장이 지난달 29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자리하고 있다. /뉴스1

하 전 지부장은 국정원 전신인 안기부 대공수사국을 시작으로 간첩을 잡는 데만 30년을 보냈다. 그는 2020년 국정원법 개정 이후 발생한 청주, 민노총, 제주·창원간첩단 사건을 언급하며 “북한 지령문에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을 전개하라’는 문구가 모두 사라졌다”고 했다. “지난 30년 동안 국정원 대공수사국 활동 근거인 국가보안법을 무력화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내려오던 지령이었는데 문재인 정부와 당시 집권 여당인 민주당이 아예 국정원 수사권을 박탈시켜 버렸으니 북한 입장에선 근심의 뿌리를 원천적으로 제거해 준 셈”이라고 했다. 민주당이 국회 압도적 다수 의석을 점유하고 있는 만큼 당분간은 대공 수사권 폐지를 되돌릴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낮기 때문에, 미 연방수사국(FBI)과 같은 독립된 간첩 수사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대공 수사 같은 내밀한 영역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 온 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1급)가 공개 활동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하 전 지부장은 “대공 수사권 박탈에 대해 말 못하는 현직 후배들의 모든 심경을 대변한다는 입장에서 활동을 결심했다”며 “그게 30년 동안 국민들로부터 녹을 받은 제 의무”라고 했다. 올해 4월엔 평소 갈고 닦은 미술 실력을 살려 ‘우리가 몰랐던 간첩 잡는 이야기’란 책도 펴냈다. 이 책에서 “나는 안에서는 간첩을 잡는 일류 수사권이었을지 몰라도 조직 밖 세상 물정을 모르는 헛똑똑이였다”며 “간첩 수사권이 정쟁(政爭)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하 전 지부장은 재임 중 미국 워싱턴주립대 로스쿨에서 국가안보학 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이토록 자국의 정보·수사기관을 악마화해 공격하는 나라는 전 세계 어디 둘러봐도 없다”며 “많은 나라들이 국가 안보를 정쟁의 소재로 삼아 국정원의 간첩 수사 기능을 무력화시킨 것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