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오른쪽)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 /AFP 연합뉴스

미국 공화당 대통령 선거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2일 X(옛 트위터)의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인 ‘스페이스’를 통해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와 음성 대담을 가졌다. 두 사람은 한때 공개 설전까지 벌일 정도로 앙숙이었지만 이번 대선을 앞두고는 브로맨스(Bromance·남성 간의 각별한 유대와 우정)를 과시하고 있다. AP는 “우호적인 대담을 통해 트럼프는 잠재 유권자 수백만 명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정치에 크게 의존하는 플랫폼 X는 그간 (트럼프가 떠나고) 겪었던 어려움을 회복할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이날 두 사람 대담의 상당 부분은 불법 이민 문제와 민주당 대선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비판에 할애됐다. 트럼프는 “해리스와 바이든의 느슨한 이민 정책으로 불법 이민자들이 멕시코와 연결된 미국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해리스가 최근 서비스업 종사 비율이 높은 네바다주에서 팁에 대한 연방소득세 폐지를 공약한 것을 놓고는 “내 공약을 베낀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이날 “오직 똑똑한 대통령만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저지할 수 있다”며 “바이든과 같은 바보들에게는 어떤 일도 맡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트럼프는 이날 대담에서 북한 김정은과의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잘 안다”며 “북한 측에서 저와의 만남을 원해 싱가포르와 베트남에서 회담이 이뤄졌다. 나 덕분에 그때 우리는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어 “가장 커다란 위협은 지구 온난화가 아닌 ‘핵 온난화’”라며 “핵을 가진 나라들이 가장 큰 위협이다. 내가 재임할 땐 핵 위기라는 것이 없었다”고 했다. 머스크도 여기에 “김정은 같은 사람들은 약한 것이 아니라 힘에 반응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트럼프는 또한 푸틴에 대해서도 “나는 그를 존중한다”며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반면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 후보직을 사퇴한 것을 놓고는 목소리를 높이며 “미국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였다”고 했다.

이날 두 사람의 대담은 오후 8시에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접속 장애가 발생해 40분 정도 지연됐다. 네티즌의 불만이 폭주했는데, 헤지펀드 거물인 빌 애크먼도 “일론에게 우리가 접속할 수 없다고 알려달라”고 댓글을 달 정도였다. 머스크는 “최대 800만명까지 동시 접속이 가능하도록 시험을 마쳤지만 대규모 디도스(DDoS) 공격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작년 5월에도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머스크와 X에서 대담을 가졌지만, 접속이 끊기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등 장애가 20분 넘게 이어진 적이 있다. 뉴욕타임스는 “머스크는 기술 오작동이 트럼프를 침묵시키려는 이들의 대규모 사이버 공격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고 했다.

12일 뉴욕의 한 시민이 노트북을 통해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간 대담을 청취하고 있다. /로이터·뉴스1

트럼프와 머스크는 실은 오랫동안 복잡 미묘한 관계였다. 2016년 머스크는 당시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지 않지만 트럼프도 대통령직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한다”고 했다. 트럼프 정부 출범 후 머스크는 대통령 자문위원회 2곳에 합류했지만, 트럼프가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한 후에는 활동을 그만뒀다. 2020년 대선에서 머스크는 결국 바이든을 지지했다. 2022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공개 설전을 주고받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트럼프는 “머스크는 믿을 수 없는 허풍쟁이”라 했고, 머스크는 “당신이 싫지는 않지만 이제 모자를 벗고 일몰 속으로 사라질 때”라며 정치 은퇴를 요구했다. CNBC는 “이 관계는 두 사람의 성격만큼이나 불안정하다”고 했다.

이후 바이든 정부의 정책이 머스크를 트럼프 쪽으로 다시 돌아서게 만들었다. 머스크는 X를 통해 이민·의료 정책을 비판했고, 특히 바이든이 범정부적으로 추진한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프로그램’에 대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2021년 백악관에서 ‘전기차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제너럴모터스(GM)·포드·스텔란티스 경영진은 초대된 반면 테슬라만 빠진 것도 바이든에 대한 머스크의 좋지 않은 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억만장자 사업가인 넬슨 펠츠 등이 이 무렵 머스크와 트럼프의 만남을 주선하며 관계 회복 역할을 한 덕도 컸다. 트럼프는 지난 3월 “수년에 걸쳐 머스크와 우호적이었고, 그를 좋아한다”고 했다. 머스크는 지난달 총격 사건 직후 트럼프를 공개 지지하고 정치 후원 단체(PAC)를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