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 미군은 3만7000명이 전사했지만, 한국군은 10만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피를 흘렸습니다. 미국도 함께 싸운 한국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14일 워싱턴DC 참전용사촌에서 6.25전 용사 존 베이커(95)씨가 한국 사관학교 생도들과 대화하고 있다. 베이커씨는 이날 "함께 싸워준 한국에 우리도 고맙다"라고 했다. /이민석 특파원

14일 오후 미국 워싱턴 DC 노스캐피털 스트리트 인근의 요양 시설인 ‘참전 용사촌’(Armed Forces Retirement Home)에서 한국의 젊은이들과 만난 6·25 참전 용사 존 베이커(95)씨가 70여 년 전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929년 남부 아칸소주(州) 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주방위군에 입대한 뒤 6·25에 참전했다. 미 육군 제235야전포병 관측대대 소속 포병이었던 그는 철원·김화·평강을 잇는 격전지 ‘철의 삼각지대’에서 싸웠다. 북한의 남침 직후부터 1953년 7월 정전이 될 때까지 전장을 지킨 그는 “온몸이 얼어붙는 혹한(酷寒) 속에서 포탄이 매순간 오갔다”며 “동료들의 상당수가 죽거나 다쳤다”고 했다. 전우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수차례 울먹였다.

베이커씨를 포함해 미군 6·25 참전 용사 20여 명이 이날 손주뻘보다도 훨씬 어린 청년들과 만났다. 한미동맹재단이 후원하는 한국 대학생 평화안보연구회(U-SPECK) 소속 육·해·공군 사관학교 생도 42명과 20대 대학생 14명이 방문한 것이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93세의 리처드 로빈슨씨의 한국 복무 당시 모습(왼쪽 사진)과 현재 모습. 그는 14일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미 참전용사촌·이민석 특파원

베이커씨는 한국을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전쟁으로 한국의 상태는 처참했지만 불과 몇 십년 만에 회복했다”며 “한국의 변화를 보고 정말 많이 놀랐다”고 했다. 이어 “자유를 위해 함께 싸웠던 한국 전우들의 임무를 이어받기로 결심한 (젊은) 한국의 생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리처드 로빈슨(92)씨는 1952∼1953년 참전했다. 일본 요코하마 부대에서 총을 받은 뒤 사세보항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내렸다. 이후 대구를 거쳐 서울에서 복무하게 됐다. 옛 서울대 캠퍼스에 자리한 미 8군 사령부에서 행정병으로 기밀을 전방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매일 오전 상부에 기밀 정보를 취합해 올렸다”며 “가끔 (팩스 등이 고장 났을 때는) 기밀 문서를 군용 차량편으로 날랐다”고 했다. 그가 서울 복무 당시 찍은 사진을 한 육사 생도에게 보여주자 생도가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옆에 있던 공사 생도가 “한국을 위해 싸워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자유 국가가 아닌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감사를 표하자 로빈슨씨가 환하게 웃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나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어요. 한국을 위해 싸운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육사 3학년 이재학 생도는 이날 연단에서 “한국인들은 항상 미군 참전용사 도움과 희생을 기억하고 있다”며 “여러분 덕분에 미국 군인은 세계에서 가장 용감하고 위대한 군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했다.

미국 6.25 참전용사(가운데)가 14일 오후 워싱턴DC 참전용사촌에서 만난 사관생도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민석 특파원

공사 4학년 조애녹 생도는 “70여 년 전 한국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을 때 미국은 3만7000명의 전사자를 내면서까지 우리를 지켰다. 어르신들 덕분에 저희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그가 ‘필승’이란 구호와 함께 경례를 하자 미국 용사들이 감격스러운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김정원(23)씨는 “그간 6·25전쟁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참전 용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숭고함이 느껴졌다”며 “한미 동맹이 무엇인지 피부로 느꼈다. 한미 관계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신경수 한미동맹재단 사무총장(예비역 육군 소장)이 참전 용사들에게 “내년에 꼭 한국으로 모시고 싶다.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뵙길 고대한다“고 하자 용사들의 주름진 얼굴에 활짝 미소가 번졌다. 신 총장은 용사들의 참전 이야기를 담아 조만간 책을 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생도들과 대학생들은 전날엔 알링턴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는 참전 용사 고(故) 윌리엄 어니스트 웨버(1925~2022) 육군 대령의 묘지를 찾아 헌화했다. 미 공수부대 대위로 6·25전쟁에 참전한 웨버 대령은 1951년 중공군의 수류탄과 박격포 공격에 팔과 다리를 잃는 상황에도 강원도 원주 북쪽 324고지 전투를 이끌었고 부상 치료 후 현역 군인으로 복무했다. 전역한 후에는 6·25전쟁과 참전 군인의 무공을 미국 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2022년 6월 그의 장례식 때는 관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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