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대통령(오른쪽)이 19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전당대회 무대에 올라 딸인 애슐리와 포옹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50년 동안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그러니 꼭 카멀라와 팀에 투표해 트럼프를 이깁시다! 나부터 기꺼이 자원 봉사자가 되겠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19일 일리노이주(州) 시카고에서 시작된 민주당 전당대회 첫날 마지막 연사로 무대 위에 올랐다. 장녀 애슐리의 소개를 받고 등장한 바이든은 이미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하얀색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자 플로어의 당원, 대의원, 지지자들이 기립해 “사랑한다 조(Joe)” “고맙다 조”란 구호를 반복해서 외쳤다. 바이든이 “고맙다” “나도 당신들을 사랑한다”고 거듭 반복했지만, 본격적인 발언을 시작하기까지 5분이 넘게 걸렸다. 민주당 출신 현직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포기한 것은 1968년 린든 존슨 이후 5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 때문에 바이든의 50년 정치 인생을 마무리하는 ‘라스트 댄스’가 될 그의 연설이 큰 관심을 받았다.

바이든은 이날 “여전히 아름다운 질 바이든에게 큰 박수를 보내달라”며 ‘아내 자랑’을 하는 것으로 입을 뗐다. 이어 ‘가족이 인생의 시작이자 중간이자 끝’이란 부친의 발언을 인용하며 “나는 국민 여러분을 가족처럼 사랑했다”고 말했다. 바이든은 본인이 취임하기 직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승복 거부로 일어난 1·6 의회 습격 사태를 언급하며 “민주주의 수호에 중요한 변곡점을 마주하고 있고, 지금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카멀라와 팀을 당선시킬 준비가 돼 있냐”며 “최고의 날은 우리 뒤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앞에 있다.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했다. 제조업 복원과 일자리 창출, 대형 제약회사와의 ‘투쟁’을 통한 약값 인하 등 정부 치적을 ‘깨알 홍보’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바이든은 “카멀라와 팀이 계속 이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은 이날 트럼프에 대해 “이보다 더 많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각을 세우며 비판하는 데 발언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트럼프는 미국이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미국이 아니면 어느 나라가 세계 리더십의 키를 쥘 수 있겠나”라고 했다. 또 “이민자가 ‘더러운 피’라 말하는 트럼프와 달리 우리는 이민자를 적대시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이번 대선에서 생식권(출산 관련 여성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가운데, 바이든은 “여성이 얼마나 무서운지 트럼프에 보여주자”라고도 했다. 그는 사상 첫 아프리카계·인도계 여성인 해리스를 러닝메이트로 고른 4년 전 선택을 언급하며 “자랑스러운 일이자 내 커리어에서 내린 최고의 결정” “해리스가 곧 47대 대통령으로 나라를 위해 복무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고령 리스크에 따른 말실수 논란이 줄곧 따라다닌 바이든이지만 이날만큼은 특정 단어의 발음을 뭉개거나 잠깐씩 말을 더듬어도 청중에서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50분 연설의 종반부에 다가갈수록 고령 논란이 무색할 만큼 활력이 넘쳤고, 가지지구 종전(終戰)을 얘기할 땐 큰 소리로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한다”며 있는 힘껏 탁자를 손으로 내리치기도 했다. 바이든은 노래 ‘미국 국가(American anthem)’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연설을 마쳤다. “미국이여, 미국이여. 나는 너에게 최선을 다했다. 재직하며 많은 실수를 했지만 나라에 내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쳤다. 29세 때 첫 상원의원으로 선출됐을 때보다 우리 나라의 미래에 대해 더 희망적이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가운데), 배우자 더글러스 엠호프 변호사(왼쪽),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가 19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등장하자 박수를 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 언론들은 해리스에 ‘횃불’을 넘겨주는 이번 전당대회를 바이든의 50년 정치 역정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실상의 ‘고별 무대’로 보고 있다. 바이든은 남은 임기 반년 동안 펜실베이니아주 등 일부 경합주에서 제한된 유세를 펼치고, 국정 운영을 마무리하는 데 집중할 것으로 알려졌다. 변호사로 사회 커리어를 시작한 바이든은 1972년 29세의 나이에 미 역사상 가장 어린 상원의원이 됐다. 이후 내리 6선을 했고, 오바마 정부에서 8년간 부통령을 지냈다. 2020년 대선에서 세 번의 도전 끝에 역대 가장 많은 표(8120만 표)를 득표하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78세 역대 ‘최고령 대통령’ 기록도 갖고 있다. 교통 사고로 첫 배우자인 닐리아, 한 살배기 딸을 잃었고 2015년 장남 보도 뇌종양으로 떠나보내는 등 바이든의 정치 역정에 아픔도 있었다.

해리스를 대선 후보로 공식 추인하는 ‘대관식’ 성격의 전당대회지만 이날만큼은 바이든이 주인공 같았다. 현장의 상당수 대의원들이 가슴에 ‘고마워요 조(Thank you, Joe)’라 적힌 검은색 배지를 달고 있었다. 이날 무대에 ‘깜짝 등장’한 해리스는 “오랜 기간 국가를 위해 봉사해 온 바이든의 역사적 리더십에 영원히 감사할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의 등장에 객석에 있던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는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바이든은 민주주의의 챔피언” “잠시 그를 위해 경의를 표하는 시간을 갖자”고, 라파엘 워녹 상원의원은 “바이든은 항상 국민을 우선에 뒀던 애국자”라고 했다. 플로어에선 대의원과 당원들이 “고마워요 바이든”이란 구호를 반복하며 기립 박수를 쳤다.


◇ 애슐리 “우리 아빠를 소개합니다”… 눈물 닦은 바이든

질 바이든 여사가 19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이날 바이든 연설 직전 최측근인 델라웨어주 지역구를 물려 받은 크리스 쿤스 상원의원, 배우자인 질 바이든 여사, 딸인 애슐리 바이든이 차례로 무대 위에 올랐다. 쿤스는 “당신은 나의 영원한 대통령이자 영원한 친구로 남을 것”이라며 “당과 나라를 대신해 민주주의 가치를 위해 싸운 당신의 노력에 감사한다”고 했다. 질 여사는 “바이든은 미국의 힘이 위협이나 실력 과시가 아닌 주변인에 대한 작은 친절,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 나라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고 믿는다”며 “이건 해리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어 “카멀라 안에서 새로운 세대에 영감을 주는 용기와 결단, 리더십을 봤다”며 “우리는 함께 싸우고 함께 이길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 직전에 무대에 올라 그를 소개한 건 1981년 질과 바이든 사이에서 나온 ‘퍼스트 도터(first daughter)’ 애슐리였다. 애슐리는 여덟 번째 생일날 기차를 타며 워싱턴과 델라웨어를 통근하던 바이든을 역으로 마중 나간 일화를 공개했다. 애슐리가 바이든에게 뛰어들었고 깜짝 축하가 있었지만 “다시 돌아가 일을 해야 한다”며 워싱턴행(行) 기차를 탔다고 한다. 애슐리는 “바이든의 딸로 인생을 사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는 걸 이때 깨달았다”면서도 “항상 나에게 최고의 친구가 되어주겠다던 부친의 말을 기억한다. 국가에 대한 그의 헌신이 사회복지사로 살고 있는 나의 인생에도 큰 영감을 줬다”고 했다. 이어 무대에 오른 바이든은 애슐리와 격하게 포옹했고, 흰색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