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대선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22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로이터·뉴스1

“정당, 인종, 성별, 언어, 계층에 상관없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 나라의 모든 국민을 대신해 여러분의 대선 후보 지명을 수락합니다. 절대로 후퇴하지 말고 우리 미래로 갑시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22일 전당대회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정치적 견해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을 통합하고, 상식을 가진 국민을 위해 싸우며, 강력한 중산층을 복원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또 “미국이 외국에서도 가치를 증진하는 데 변함이 없고 글로벌 리더십을 강화할 것”이라며 “트럼프에 아첨하는 김정은 같은 독재자, 폭군과 친하게 지내려 알랑거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해리스는 미 역사상 첫 흑인 여성 대통령에 도전한다. 이날 나흘 간의 전당대회가 마무리되면서 미국 대선도 ‘해리스 대 트럼프’ 구도로 70여 일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두 후보는 다음 달 10일 TV토론에서 처음 맞붙는다.


◇ 중산층 출신 배경 강조… “내 유일한 고객은 사람”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22일 전당대회에서 후보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해리스는 이날 약 40분 동안 진행한 후보 수락 연설을 했다. 지난달 공화당 전당대회 당시 도널드 트럼프가 한 연설(1시간 30분)보다 짧았고, 2012년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의 연설 길이(39분)와 비슷했다. 해리스는 “이번 선거에서 우리나라는 분열과 냉소의 과거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신세계로 나아가는 새 장을 여는 기회를 잡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했다. 이어 “다양한 견해를 가진 미국인들이 연설을 지켜보는 것을 알고 있고, 나는 모든 미국인을 위한 대통령이 될 것을 약속한다”며 “우리를 하나로 통합하고 경청하고 이끄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했다. “상식적인 미국인을 위해 싸우는 대통령이 될 것이고, 이건 법정에서부터 백악관까지 계속된 내 인생 과업이다” “최근 몇 년의 여정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런 예상 밖의 일이 낯설지 않다”고도 했다.

해리스는 인도계 모친, 아프리카계 부친 사이의 캘리포니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 시절 경험을 상세히 공유하며 “중산층은 나의 출신 배경이고 강력한 중산층을 건설하는 것이 대통령 재임의 핵심 목표가 될 것”이라고 했다. 19살에 인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과학자 출신 모친 샤밀라에 대해 “오늘 밤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또 고등학교 시절 계부에게 성폭행당한 친구 완다를 도운 경험을 털어놓으며 “그게 내가 검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유고, 이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법조계에 발을 들였다” “나의 유일한 클라이언트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해리스는 샌프란시스코 검찰총장,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을 거쳐 2016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해리스는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향해 “대법원이 그에 대한 형사 기소에 면책 특권을 부여한 상황에서 그가 가지게 될 힘을 상상해 보라”며 “트럼프는 진지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를 백악관에 다시 들여놓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에게는 가드레일이 없고, 그의 유일한 고객은 자기 자신”이라고도 했다. 민주당은 이번 전당대회에서 나흘 내내 헤리티지재단의 차기 보수 정부 정책공약집인 ‘프로젝트 2025′를 때렸는데, 해리스도 이를 재론하며 “트럼프 2기가 어떨지는 여기에 다 나와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We are not going back)”이라 말하자 환호성이 쏟아졌다.


◇ 美 글로벌 리더십 강화 시사… “폭군 김정은 가까이 안 해”

22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카멀라 해리스 대선 후보, 팀 월즈 부통령 후보 등이 무대를 바라보고 손을 흔들고 있다. /AFP 연합뉴스

해리스가 트럼프와의 차별화를 가장 선명하게 추구한 건 외교·안보 분야였다.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포기하는 것 아니라 강화하도록 만들 것”이라며 “총사령관으로서 우리가 항상 세계에서 강력하고 치명적인 전투력을 보유하도록 군과 그 가족의 헌신, 희생을 항상 존중하겠다”고 했다. “트럼프가 나토 탈퇴를 위협하고, 푸틴에게 ‘러시아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우리 동맹국을 침공하라 부추겼다”며 “우크라이나와 나토 동맹국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진보 진영 내부 갈등이 심각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충돌을 놓고는 “항상 이스라엘의 방어권을 옹호할 것”이라면서도 “지난 10개월 동안 가자지구에서 무고한 생명이 절망적으로 죽었다. 이스라엘 인질들이 석방되면 가자지구의 고통이 끝나고, 팔레스타인 국민들은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를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해리스는 “트럼프가 응원하고 조작하기 쉽다는 걸 아는 김정은과 같은 폭군, 독재자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재임 중 북한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진 트럼프는 그동안 유세 때마다 김정은과의 친분을 과시했고, 재집권 시 미·북 대화를 재개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해리스는 “(김정은 같은) 독재자들은 트럼프가 자신의 책임을 묻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며 “이는 트럼프 본인도 독재자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나는 민주주의와 폭정(暴政)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 사이에서 미국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알기 때문에 대통령으로서 우리의 안보·이상을 수호하는 데 결코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대선의 핵심 쟁점이자 민주당 지지층이 중시하는 생식권(여성이 출산 관련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 보장을 강조하는 데도 발언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트럼프가 보수 성향 대법관을 임명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는 정신 나간 일을 했다”며 “대통령이 되면 연방 차원에서 여성의 자유와 선택권을 보장하는 법안에 서명할 것”이라고 했다. 해리스는 불법 이민 문제에 대해서도 “이민자들이 이룩한 위대한 ‘아메리칸 드림’을 지속하면서 국경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며 “트럼프가 죽인 초당적 안보 법안을 다시 가져와 서명하겠다”고 했다.


◇ 10번째 결혼기념일… “사랑하는 더그” 입맞춤도

민주당 대선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오른쪽)이 22일 전당대회에서 후보 수락 연설을 마친 뒤 배우자 더글러스 엠호프와 입맞춤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해리스는 “나는 미국을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한다”며 “가는곳 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가 나갈 준비가 돼 있다고 느낀다. 이 나라에선 어떤 것도 가능하고, 어떤 것도 우리의 손에 닿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이날은 해리스와 배우자 더글러스 엠호프의 10번째 결혼기념일이었는데, 해리스는 연설 서두에 “사랑하는 더그에 가장 고맙다는 마음을 전한다” “기념일 축하해, 더기(Dougie)”라고 했다. 해리스의 연설이 있기 직전 세 살 터울 동생인 변호사 마야도 무대에 올라 “돌아가신 어머니가 함께 했으면 좋았겠지만 왔다면 우리에게 ‘어서 일하라’고 채근했을 것”이라며 “나의 큰 언니는 차기 미국 대통령이 돼 여러분을 위해 힘을 다해 싸울거라 확신한다”고 했다. 마야는 17살에 싱글맘이 됐지만 해리스의 각별한 보살핌 아래 법조인이자 정책 전문가로 거듭났다.

이날 해리스가 연설을 마치자 더그와 부통령 후보인 팀 월즈 부부가 무대로 올라왔다. 해리스는 더그와 입을 맞췄고, 이번 전당대회 준비를 총괄한 민주당전국위원회(DNC)가 천장에 매달아 놓았던 빨간색·하얀색·파란색 풍선 10만 개가 내려왔다. 한편 조 바이든 대통령과 질 바이든 여사는 이날 연설을 앞두고 해리스에 전화를 걸어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전당대회 첫날인 19일 해리스 지지 연설을 한 뒤 캘리포니아주 센트럴 밸리에서 휴가 중인 부부는 X(옛 트위터)에서 “역사적인 후보 지명 수락의 순간을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다”고 했다. 해리스는 이날 “바이든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고 감사하다”며 “역사가 당신의 이룬 업적을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왼쪽에서 두번째)와 팀 월즈 부통령 후보(세번째)가 22일 전당대회에서 손을 맞잡고 무대를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로이터·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