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당신이 캘리포니아의 톱캅(Top Cop·검찰총장)으로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흑인이 교도소에 가고 경찰에 희생됐는지 아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흑인 대통령’ 운운하며 표를 달라고?”

19~22일 미국 시카고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동안 행사장 밖에선 친(親)팔레스타인 활동가부터 성소수자(LGBTQ)·흑인 인권운동 단체까지 다양한 이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진은 22일 친팔레스타인 단체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 정부를 향해 항의 시위를 하는 모습이다.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20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유니언 공원에서 만난 글로리아 파이넥스씨는 세상을 뜬 아들 다리우스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민주당 대통령·부통령을 확정하는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500m 떨어진 곳이었다. 다리우스는 민주당 정권인 버락 오바마 정부 때 시카고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고 했다. 미국 사회에선 백인 경찰이 흑인들을 과잉 진입해 사망하는 일이 잦아 인종 갈등의 원인이 돼 왔다. 나흘간 열린 전당대회 마지막 날인 22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 확정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인도계 흑인이다. 하지만 이날 시카고 곳곳에선 이미 흑인 대통령(오바마)을 배출한 민주당 정부가 그동안 흑인 인권 신장에 미온적이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은 흑인들의 시위가 곳곳에서 열렸다. 파이넥스씨는 “도대체 미국 사회는 언제쯤이면 흑인들을 돌볼 것인가”라고 했다.

시카고 곳곳에선 반(反)이스라엘 시위가 한창이었다. 지난해 10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 간 전쟁이 발발한 후 가자지구의 민간인 사상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데 대한 반발이었다. 집회에 참가한 라파엘씨는 “가자지구에서 일어나는 대량 학살을 보라. 파시스트이자 여성 혐오자인 트럼프나, ‘학살’ 주범인 해리스나… 선택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20일엔 이스라엘 영사관 앞에선 반이스라엘 시위대 60여 명이 체포됐다. 이런 반발 가운데서도 해리스는 22일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변함없는 미국의 지원 의지를 확실히 했다.

그래픽=김성규

4년에 한 번 치러지는 전당대회는 자유 민주주의의 하이라이트라고도 불린다. 50주에서 한자리에 모인 각 당 대의원들이 대통령 후보를 추대하고 당의 나아갈 방향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거대한 ‘쇼’가 펼쳐진다. 또 하나의 축제장은 전당대회장 바깥이다. 미 전역에, 나아가 세계 각지에 자신의 목소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시민들이 모여들어 ‘표현의 자유’를 거리낌 없이 실행한다. 이번 전당대회장 부근에서도 시카고에 모인 대의원·당원과 세계 각국의 언론인 등 약 5만명을 대상으로 ‘우리의 주장’을 알리고자 하는 집회와 회견이 쉼 없이 이어졌다. 현장에서 만난 집회 참가자들의 주장엔 지금 미국 사회가 고민하고 갈등하는 이슈가 무엇인지가 담겨 있었다. 민주당 관계자는 “보수·진보 프레임에서 벗어나 오로지 단 하나의 이슈로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원 이슈 보터(one Issue voter·단일 사안 투표자)’가 늘고 있어 집회 강도가 더 세지고 있다”고 했다.

인종차별 문제와 팔레스타인 인도적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시위는 시카고 곳곳에서 계속 열렸다. 또 이번 대선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가장 첨예한 이슈 중 하나인 낙태권 문제도 표출됐다. 낙태 합법화 운동을 벌이는 비영리 단체 ‘플랜드 페어런트후드(Planned Parenthood·계획된 부모 되기)’는 이번 전당대회 기간 시카고 도심에 정관 수술, 약물을 통한 임신 중절 등을 제공하는 이동식 버스를 설치해 보수 진영에 공격당했다. 이 단체 관계자 메리씨는 “생식의 자유(reproductive freedom)가 이번 대선의 정말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고, 이 문제가 더 많이 부각될수록 해리스의 승산이 커진다”라며 “상·하원 선거까지 승리해 2년 전 (보수 성향) 대법원에 의해 폐기된 ‘로 대 웨이드’ 판결(여성의 낙태권을 연방 차원에서 보장)을 되돌려야 한다. 여성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는 건 비극적인 일”이라고 했다. 메리는 가슴 오른쪽에 ‘우리가 결정한다(we decide)’라 적힌 배지를 달고 있었다.

성소수자 권익 문제는 20·30대가 특히 큰 목소리를 내는 사안이었다. 22일 만난 게리씨는 각각 ‘바이(bi·양성애자)’ ‘게이(gay·남성 동성애자)’ ‘레즈(les·여성 동성애자)’라고 적힌 토트백을 비치해 놓고 팔고 있었다. 해리스의 이름과 성소수자 권익을 상징하는 무지개색이 들어간 티셔츠도 판매했다. 그는 “별것 아니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작은 것을 보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기부·후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전국의 진보 지지자들이 모이는 전당대회만큼 나에게 좋은 ‘판’은 없다”고 했다. 그는 미국의 첫 성소수자 장관이자 해리스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도 거론됐던 피트 부티지지 교통장관의 전날 연설을 거론하며 “그가 부통령 후보 티켓을 거머쥐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런 추세대로라면 언젠가 민주당이 성소수자 권익을 더 큰 목소리로 주장할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1909년 설립된 유서 깊은 흑인 인권 단체인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ACP) 관계자들은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시카고 곳곳을 누볐다. 이들의 목표는 11월 대선 때 더 많은 흑인 유권자를 투표소로 끌어내는 것이다. 셔츠엔 ‘우린 당파적이지 않지만 미치도록 정치적이다’ ‘투표하는 게 나의 흑인 직업(black job)’이라고 적혀 있었다. ‘흑인 직업’은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흑인 언론인 협회 행사에서 언급한 용어다. ‘흑인 직업’이 따로 있는 것처럼 해석돼 많은 흑인 유권자의 공분을 샀다. 마커스씨는 “2024년에 백인·흑인·아시아인 직업이 분리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우리가 사상 첫 여성·흑인 대통령을 만들면 트럼프에게 가장 좋은 역공(逆攻)이 될 것이다. 흑인들이 투표장에 나올 수 있게, 이렇게 독려하는 이유”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