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2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한 노동단체 행사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 뉴스1

“제철소·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다 일자리를 잃은 청년들은 이곳을 떠났고 시골에 홀로 남은 노인들은 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지난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만난 한 식당 주인은 “지금 미국에서 우리에게 남은 ‘파이(사회적 지분)’가 있는지 모르겠다. 누구 탓일까”라고 했다.

미 대통령 선거가 두 달 뒤인 11월 5일 치러진다.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전국 단위 및 경합주 여론조사에서 초접전 승부를 벌이고 있다. 이번 미 대선의 승부는 경합주 일곱 곳에서 판가름이 날 가능성이 크다. 미 대선은 각 주의 승자가 인구에 따라 배정된 선거인단을 모두 가져가는 방식으로 치러진다. 이날 찾은 펜실베이니아는 경합주 중 가장 많은 선거인단(19명)이 배정된 곳으로, 이 주에서 이겨야 대선 승리 가능성이 커진다. 대표적인 러스트벨트(제조업 쇠락 지역)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픽=정인성

미국의 노동절이었던 이날 피츠버그 일대에선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와 집회를 하고 있었다. 펜실베이니아는 과거 민주당 지지세가 강했지만 2016년 예상을 깨고 트럼프에게 더 많은 표를 줬고, 이는 트럼프의 ‘깜짝 승리’를 만든 큰 변수가 됐다. 당시 제조업 쇠퇴로 위기에 빠진 백인 남성들이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주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많은 노조원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웃는 사람이 마지막에 웃는다”라고 강조했다. 이 지역 경제를 제대로 챙기겠다는 공약을 내놓지 않으면 이번 대선 승리를 탐하지 말라는 압박으로 들렸다.

펜실베이니아의 승자는 누구 펜실베이니아를 누가 가져갈 것인가. 미 대선의 최대 승부처로 꼽히는 펜실베이니아에서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벼랑 끝 혈투’를 펼치고 있다. 사진은 2일과 지난달 30일 각각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와 존스타운에서 유세한 해리스(위) 부통령과 트럼프(아래) 전 대통령. /EPA 연합뉴스·로이터 뉴스1

이날 집회 참가자 중엔 민주당 지지자가 다소 많아 보였다. 지난달 후보를 사퇴하고 해리스에게 ‘횃불’을 넘긴 조 바이든 대통령이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 출신이라는 점이 다소 영향을 끼친 것도 같았다. 이날 노동자 집회에 ‘고마워요, 조’라 적힌 바이든의 실물 모형을 들고 온 마이클 아이작슨씨는 “스크랜턴의 자랑스러운 아들 바이든은 지난해 자동차 노조 파업에도 함께했을 정도로 노동 친화적인 지도자였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해리스의 토론 실력은 확인해 봐야겠지만 나는 아마도 그녀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이 지난해 내내 자동차 노조 등 노동계에 공을 들인 것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둔 모양이었다. 의료계에서 일한다는 빌 윌리엄슨씨는 “바이든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최고의 노동 친화적 대통령”이라고도 했다.

그래픽=김하경

펜실베이니아주 서부에 있는 인구 30만명의 피츠버그는 필라델피아에 이어 주에서 둘째로 큰 도시다. 도심은 고층 건물이 많았는데 대부분이 19세기에 지어졌을 정도로 낡은 모습이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구 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라 불릴 만큼 번성했지만 2년 전엔 길이 100m가 넘는 교량이 붕괴돼 다리가 무너지는 등 기반 시설까지 낡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날 집회가 끝난 후인 오후 1시부터 피츠버그는 인적이 드문 모습이었고 상점들은 오후 7시가 되자 모두 문을 닫았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지역 경제를 되살려 이 도시에 활력이 돌아오게 하겠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후보가 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펜실베이니아는 1992~2012년까지 민주당 후보가 내리 승리했다. 민주당 텃밭을 뜻하는 ‘블루 월(blue wall·민주당 철벽)로 분류됐지만 2016년 대선 때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에게 넘어가며 민주당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 4년 뒤 민주당의 바이든이 간신히, 아주 적은 표차로 펜실베이니아를 탈환했고 그 선거에서 당선됐다. ‘펜실베이니아를 가진 자가 대선에서 이긴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 셈이다. 현재 상황은 초박빙이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가 집계한 8월 여론조사 평균을 보면 해리스가 47.7%, 트럼프가 47.2%로 사실상 동률이었다. 양 후보가 이 지역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2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도심에서 열린 노동절 맞이 시가행진에서 마이클 아이작슨씨가 '고마워요, 조'라 적힌 조 바이든 대통령 실물 모양의 입간판을 들고 서있다. /피츠버그=김은중 특파원

해리스·트럼프가 펜실베이니아에 얼마나 사활을 걸고 덤비는지는 광고비에도 나와 있다. 두 선거 캠프가 최근 한 달 동안 경합주 일곱 곳에서 쓴 광고비 약 1억1000만달러(약 1500억원) 중 38%가 펜실베이니아에 투입됐다. 해리스는 민주당의 ‘집토끼’였음에도 언제든 ‘탈출’할 준비가 돼 있는 노동자 표심에 호소하고 있고, 트럼프는 기득권 엘리트층에게 거부감이 큰 중장년 백인 계층의 결집에 기대를 걸고 있다. 두 후보는 오는 10일 펜실베이니아의 최대 도시 필라델피아에서 첫 생방송 토론을 갖는다.

이날 해리스와 바이든은 피츠버그를 방문해 노동단체 행사에서 공동 유세를 하며 노동자들을 향한 노골적인 ‘구애’를 했다. 해리스는 이날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계획에 대해 처음 반대 의사를 밝혔는데, 유권자 표심을 의식한 행보로 해석됐다. US스틸은 1901년 피츠버그에 설립돼 본사를 지금도 두고 있다. 이제 경쟁력을 상실했지만 20세기 미국이 최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한 기업이고, 이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과 애정이 크다. 해리스는 이날 “US스틸은 미국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기업으로 계속 남아야 한다는 바이든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언제나 미국 철강 노동자들을 뒤에서 지켜줄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도 “우리 정부는 80만개의 제조업 일자리를 창출했으며 역대 가장 친(親)노조 성향이었다. 노조가 바로 서면 나라가 바로 설 것”이라며 러스트벨트의 민심 공략에 힘을 보탰다.

2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열린 노동절 시가행진에서 교사 재커리씨가 행진을 하고 있다. /피츠버그=김은중 특파원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해리스가 안심할 수 없는 건 지역 경제를 떠받친 ‘중후장대 산업’의 후퇴를 막기 어렵고, 이 때문에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남게 된 고령·백인 노동자가 느끼는 소외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 인구통계국 자료를 보면 지난해 기준 펜실베이니아의 백인 비율은 전체의 75%로 미국 전체 평균(59%)을 크게 웃돈다. 이들이 종사해온 제조업은 쇠락을 계속해, 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1970년대 40%에서 2020년 10%대로 떨어졌다.

이런 경제 침체가 알코올 중독, 약물 과다 복용, 자살 등으로 인한 사망을 뜻하는 ‘절망의 죽음’을 늘어나게 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비영리단체인 ‘트러스트 포 아메리카스 헬스’가 2019년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절망의 죽음’으로 인한 펜실베이니아의 사망 비율은 미국 평균보다 50%가 높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은 “이 같은 좌절에 내몰린 백인 남성들이 트럼프의 주력 지지층”이라고 했다.

조시 샤피로 펜실베이니아주 주지사(가운데 흰 옷 차림)가 2일 피츠버그 도심에서 열린 노동절 시가행진에서 노조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피츠버그=김은중 특파원

이코노미스트가 지난달 미국 50개 도시의 ‘경제적 이동성’(저소득층이 고소득층으로 올라가는 비율)을 측정한 결과, 필라델피아가 최하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만큼 경제가 역동적이지 않고, 경제 주체 간 계급 구조가 고착화돼 있다는 뜻이다. 피츠버그 교외에서 사격 연습장을 운영하는 딘 청씨는 “민주당 출신 지도자들이 고위직을 세습하다시피 하고 있다”며 “하지만 그들은 이상(理想)만 높다. 미국의 경제를 개선할 제대로 된 통치는 언제 하려고 하나”라고 했다.

2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도심에서 열린 노동절 시가행진에서 존 에반스모어(가운데)씨를 비롯한 이들이 조 바이든 정부의 중동 정책을 비판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피츠버그=김은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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