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저녁 ABC 대선 토론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왼쪽)과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이 대결하는 모습. / UPI 연합뉴스


오는 11월 5일 열리는 미국 대통령 선거 판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후보 간 생방송 토론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국립헌법센터에서 10일 열렸다. ABC가 주관한 이 토론에서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60) 부통령이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78) 전 대통령의 약점을 파고들며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친(親)민주당 성향인 CNN은 “해리스가 트럼프를 (‘미끼’로) 낚았다”고 했고, 트럼프를 지지해 온 폭스뉴스 정치 분석가 부릿 흄도 “트럼프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오늘만큼은 해리스의 밤이었다”고 평가했다.

지난 6월 첫 대선 토론 때는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조 바이든(82) 대통령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등 인지력 저하 문제를 드러냈고 결국 다음 달 사퇴했다. 반대로 이번 토론은 거짓 주장을 반복하고 쉽게 흥분한다는 트럼프의 약점을 해리스가 잘 공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토론 종료 후 CNN 여론조사에선 63%가 ‘해리스가 이겼다’고 답했다. ‘트럼프가 이겼다’는 응답은 37%였다. 45%는 해리스를 긍정적으로 본다고 응답해 호감도가 토론 전(39%)보다 6%포인트 상승했다. 특히 부동층 유권자 중 해리스의 호감도가 30%에서 48%로 크게 올라갔다. 반대로 트럼프는 호감도가 토론 전 41%에서 39%로 다소 내려갔다.

그래픽=정인성

토론 전까지만 해도 바이든 사퇴로 계획에 없이 후보가 된 해리스가 생방송 토론 경험이 많은 트럼프의 맹공에 밀릴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막이 오르자 예상을 깨고 해리스가 더 적극적으로 ‘창(槍)’을 휘둘렀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낙태권 제한, 2020년 대선 패배 부정, 유언비어에 기반을 둔 이주자 비방 등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유권자들의 의구심을 키울 수 있는 소재를 잇달아 이끌어냈다. 수세에 몰린 트럼프는 “(낙태권 보장 지지자들은) 아기가 태어난 다음에도 살해한다” “이주자들은 기르던 개와 고양이를 먹는다” 같은 사실무근의 무리한 주장을 펼쳤다.

해리스도 셰일 가스 시추 허용에 대한 입장 뒤집기 등 몇몇 질문에 얼버무리며 모호하게 답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론 낙태권 등 자신의 강점이 확실한 이슈를 효과적으로 트럼프 공격에 활용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트럼프는 이에 성난 표정과 고성(高聲)을 드러내며 평정심을 잃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워싱턴포스트(WP)는 “해리스가 맹렬한 수사로 트럼프의 방어를 유도해 가며 날카롭게 공격했다”고 평가했다.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미 대선은 지지율이 거의 비슷한 해리스·트럼프가 초접전을 벌이고 있다. 이날 90분간 생중계된 토론은 이번 선거 승패를 좌우할 부동·중도층의 지지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으로, 트럼프에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해리스는 이날 검사 출신답게, 이미 유죄 평결이 난 성인물 배우 성 추문 사건 등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도 조목조목 상기시켰다. 토론 직전까지 트럼프 참모들은 ‘해리스의 공격에도 침착함을 유지해야 한다’며 트럼프에게 조언했지만 결국 그는 평정심을 잃었다. 고금리·고물가 상황, 불법 이민 급증 등 바이든 정부의 실정(失政)을 언급하며 반격에 나서기도 했는데 해리스를 압도하진 못했다. 미 정치 매체 폴리티코는 “해리스는 토론 내내 트럼프를 ‘증인석’에 세워 검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며 “(흥분한) 트럼프가 계속해서 공격 포인트를 잃고 헤맸다”고 했다.

해리스 캠프는 토론 직후 “10월에 다시 한번 토론하자”고 트럼프 측에 제안했다. 다만 트럼프는 이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2차 토론을 할지는 모르겠다”고 해 ‘결투’가 다시 성사될 가능성은 불투명하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이날 대선 후보 토론은 선거의 최대 격전지이자 가장 결정적인 경합주로 꼽히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열렸다. 트럼프는 공화당을 상징하는 빨간색 넥타이를 맸고, 해리스는 검은색 정장에 흰 블라우스를 받쳐 입었다. 8년 전인 2016년 트럼프와 맞붙었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선택한 강렬한 빨간 정장과 대조되는 패션으로, 대선 후보로서의 무게감과 트럼프와 대조되는 안정감을 강조하려는 의도란 분석이 나왔다.

해리스는 이날 그간 준비해 온 ‘펀치 라인(정곡을 찌르는 발언)’을 쏟아내 트럼프의 화를 돋웠다. “지난 대선에서 (바이든에게 투표한) 8100만명으로부터 ‘해고’당했는데도 아직 이해를 못 한다” “전 세계가 트럼프가 대선 후보라는 걸 비웃는다”고 하자 트럼프는 소리를 높이며 “(내가 패배한) 지난 대선 결과를 아무 법원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해리스가 당선되면 3차 대전이 일어난다”고 무리한 표현을 동원해 반격했다. 뉴욕타임스는 “해리스가 ‘세계 지도자들이 당신을 수치로 여긴다’ ‘결국 재산은 다 아버지가 쌓은 것 아니냐’같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하면 트럼프가 참지 못하고 자해에 가까운 대응을 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트럼프의 흥분한 답변에 눈썹을 추켜올리고 웃거나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해리스는 트럼프의 최대 약점인 에고(ego·자기애)를 공격해 무너뜨렸다”고 평가했다.

그래픽=정인성

이날 언론 평가는 정치적 성향을 불문하고 해리스의 판정승으로 기울었다. CNN은 “해리스의 전략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을 궤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해리스 관계자들은) 마치 그녀가 ‘버튼’을 누르면 토론이 계획대로 움직이는 듯 느꼈다”고 했다. 영국 BBC는 “대부분의 경우 트럼프는 자신의 특기인 ‘수사적 펀치’를 날리지 못했다. 며칠 동안 이를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트럼프는 이날 토론 부진을 ‘편파 진행’ 탓으로 돌렸다. 이날 ABC 사회자들은 ‘실시간 팩트체크’를 시도했는데 공화당 진영은 ‘해리스를 노골적으로 도와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행자들이 트럼프의 발언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나오면 즉각 바로잡는 등 해리스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날 사회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뮤어는 트럼프가 “이주자들 때문에 미국 범죄율이 올라갔다”고 하자 “아시다시피 연방수사국(FBI)은 미국에서 전반적인 폭력 범죄가 실제로 감소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바로잡기도 했다. 트럼프는 이에 흥분해 “FBI 통계는 사기다. 민주당이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는 일자리 수처럼 말이다”라고 공격했고, 해리스는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WP는 “바이든 사퇴 후 미 대선 판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확인할 토론에서 해리스가 트럼프에게 ‘골’을 먹였다. 트럼프는 방어적이고 불명확한 답변을 자꾸 던짐으로써 민주당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줬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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