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 마음 여린 소녀가 반쯤 얼어붙은 불쌍한 뱀 한 마리를 봤어 / 그녀는 울었지 ‘오, 내가 널 받아줄게 내가 널 돌봐줄게’…”
29일 경합주 펜실베이니아주(州) 이리 카운티를 찾은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유세 도중 시를 한 수 읊기 시작했다. “누가 아직도 이 시를 못 들어봤냐”며 “이건 국경에 관한 얘기다. 우린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트럼프가 시를 낭독하는 약 3분 동안 청중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그가 전한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랬다. “‘오 닥쳐 이 어리석은 여자야’ / 파충류가 웃으며 말했다 / ‘당신은 나를 데려가기 전에 내가 뱀이라는 것 잘 알고 있었잖아’…”
트럼프가 “이게 지금 우리 국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말하자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유세 때마다 1시간 넘게 연설하며 직설적인 발언으로 일관하는 트럼프가 문학적 수사(修辭)를 차용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트럼프 본인이 과거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며 문학과의 ‘거리두기’를 고백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날 트럼프가 읽은 시 ‘더 스네이크(The Snake)’는 그가 대통령직에 처음 도전한 2016년 1월 아이오와주 캠페인을 시작으로 지난 8년 동안 캠페인에 종종 등장한다. 270 단어가 넘는 이 시에선 한 소녀가 추운 겨울 굶어 죽을 것 같았던 뱀이 불쌍해 보여 집까지 데려와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고 우유를 데워 준다. 그런데 기력을 회복한 뱀이 돌연 소녀를 공격한다. 소녀가 “나는 너를 살려줬는데 왜 나를 공격하냐”고 묻자 뱀은 “너는 내가 뱀인 줄 알고도 나를 살려줬잖아”라고 답한다.
트럼프는 이 시를 자신이 정치에 투신한 뒤 줄곧 정치 쟁점화해 온 ‘불법 이민’ 문제에 대한 완벽한 은유로 해석한다. 여기서 소녀는 미국인, 뱀은 불법 이민자를 의미한다. 선의(善意)로 받아들인 이민자들이 범죄를 저질러 사회에 큰 손실을 초래하고, 나아가 미국이란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불법 이민자가 미국의 피를 더럽히고 있고, 따라서 대규모 추방이 필요하다”는 게 트럼프의 입장이다. 올해 3월 오하이오주 집회에서도 “매우 정확한 은유”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놀라지 말라”며 이 시를 낭독했다. 과거 트럼프가 돋보기 안경까지 써가며 시를 읽은 적도 있는데, 그가 가진 애정과 집착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 시는 시카고의 흑인 소울 가수이자 민권 운동가였던 오스카 브라운 주니어가 1963년 쓴 노래 가사가 그 기원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당시에는 흑인 문화를 찬양하고 인종 차별을 거부하는 작품으로 묘사됐다”며 “트럼프가 이 노래의 유래를 알게되면 놀랄지도 모른다”고 했다. 50년이 지나 트럼프가 이 노래를 ‘불법 이민’ 문제를 정치 쟁점화하는데 사용하자 브라운의 두 딸이 “부친의 업적에 찬물을 끼얹지 말라” “노래는 편견, 인종 차별적 사고와 전혀 무관하다”며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트럼프가 어떻게 해서 이 노래를 알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2016년 선거 캠프를 지휘했던 코리 레반도프스키는 언론에 “누군가 (우편물로) 보낸 것 같다”고 했다.
◇ 트럼프 “해리스 정신 장애”… 인신 공격 되풀이
한편 트럼프는 이날도 민주당 대선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 대해 “정신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고 믿는다”며 인신공격을 되풀이했다. 트럼프는 전날 위스콘신 유세에서도 해리스가 “정신적 손상이 있고, 정신 장애를 갖고 있다”며 근거 없는 공격을 했다가 공화당 인사들로부터 ‘정책에 집중하라’는 비판을 받았다. 트럼프는 “해리스보고 마르크스주의자라 했더니 대부분의 사람이 용어의 의미를 몰라 ‘그게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하고 묻는다”라며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날 트럼프가 찾은 이리 카운티는 경합주인 펜실베이니아 중에서도 전체 표심이 잘 나타나는 대표적인 ‘벨웨더(bellwether·길잡이) 카운티’로 선거 때마다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