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DC의 백악관과 의회 의사당을 잇는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한가운데엔 ‘더 캐피털 그릴’이란 고급 스테이크 하우스가 있다. 1994년 영업을 시작한 이곳은 미 정가에서도 유명한 만남의 장소로 꼽힌다. 오랜 기간 워싱턴의 정치인들과 로비스트, 정부 관계자 등의 모임 장소로 사랑받았다. 가격은 점심 1인당 100달러(약 13만원) 수준으로 저녁엔 와인까지 곁들이면 200달러를 훌쩍 넘는다. 워싱턴 도심에는 이런 스테이크 하우스가 수십여 개 있다. 대부분이 점심·저녁 할 것 없이 만원(滿員)을 이룬다.
워싱턴의 지역 언론 매체 ‘워싱토니언’은 30일 “트렌디한 음식점들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스테이크 하우스의 위상이 예전 같진 않지만, 스테이크 하우스는 여전히 정치인들이 동맹을 맺고 로비스트들은 의원에게 로비를 하며 거액의 선거 자금이 모이는 장소”라고 했다. “워싱턴이 늪이라면 스테이크 하우스는 악어 구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지난해 뇌물 수수로 기소돼 정계를 은퇴한 밥 메넨데스 전 상원 의원은 1년 중 250일 저녁을 백악관 근처의 스테이크 하우스 ‘모턴스’에서 먹은 것으로 재판 과정에서 알려지기도 했다.
스테이크 하우스를 모임 장소로 선호하는 현상은 공화당 쪽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11월 대선과 상·하원 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인사들이 ‘더 캐피털 그릴’ 레스토랑 한 곳에만 쓴 금액이 76만2000달러(약 10억원)로 집계됐을 정도다. 민주당의 약 13배 수준이다. 가장 많은 돈을 계산한 이는 공화당 하원 원내 총무인 스티브 스컬리스 의원으로 이 식당에서만 13만달러를 썼다. 결제 금액 기준 상위 5명이 모두 공화당 의원이거나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 활동 위원회(PAC) 인사다. 이는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남부 지역의 주요 산업이 목축업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채식을 강조해 온 진보 진영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읽힌다. 실제로 11월 텍사스주(州)에서 3선에 도전하는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유세 때마다 “카멀라가 내 스테이크를 가져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스테이크 하우스를 즐겨 찾는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대통령 재임 중엔 백악관 코앞에 있는 본인 소유 호텔에 ‘BLT 프라임’이란 고급 스테이크 하우스를 차려 놓고 출입했다. 트럼프와 그의 이너서클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도 따로 있었다. 당시 트럼프의 측근이었던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워낙 단골이라 식당 측에서 명패를 따로 만들어 올 때마다 꺼내줬다고 한다. 당시 우리 정부 고위 관계자들도 워싱턴에 올 때면 트럼프 정부에 줄을 대기 위해 이곳에서 비공식 만남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11월 대선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대표적인 친(親)트럼프 싱크탱크인 ‘보수 파트너십 연구소(CPI)’는 아예 의사당 주변에 부동산을 매입해 거물들이 교류할 수 있는 새로운 라운지와 레스토랑을 계획하고 있다. 폴리티코는 “일부 로비 업체는 아예 1층에 스테이크 하우스가 있는 건물로 사무실을 옮겼다”며 “고객이 주요 정책 입안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훌륭한 장소”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