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을 하루 앞둔 4일 워싱턴DC 백악관 근처 한 상업용 건물에서 관리자들이 건물과 주차장 입구에 철제 펜스를 설치하고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영업 중. 들어오세요! (We are OPEN. Come in!)’

미국의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를 하루 앞둔 4일. 수도 워싱턴DC의 한 가운데 있는 백악관 근처 음식점과 상점 입구에는 빠짐없이 이런 문구가 걸려 있었다. 패스트푸드 체인인 맥도날드, 커피를 파는 피츠커피와 샌드위치 가게 팟밸리 등 점심시간이면 근처에 근무하는 백악관, 연방 정부 직원과 일대 직장인들로 발디딜 틈이 없던 곳들은 모두 성인 남성 키보다 조금 더 높은 철제 펜스나 코르크 합판에 둘러싸여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된 백악관 건너편 박물간 ‘더 피플스 하우스’의 기념품 판매 공간은 아예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백악관 북서쪽 입구에는 평소보다 많은 경찰차가 배치돼 있었고, 가슴에 ‘비밀경호국(SS)’ 문구가 박힌 검은색 복장을 입은 요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거리를 순찰하고 있었다.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역대급 초접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수도 워싱턴DC는 긴장감이 크게 고조된 모습이었다. 1968년 4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암살, 2017년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 2020년 5월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2021년 1·6 의회 습격 사태 등 미국 현대사의 변곡점마다 수도에선 크고 작은 시위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워싱턴 시내의 상점들이 애꿎은 분풀이의 대상이 되곤 했다. 화재가 발생한 적도 있다. 올해도 이미 소셜미디어 등에서 폭동을 모의하는 정황들이 나타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극렬 지지 단체인 ‘프라우드 보이스’ 회원들이 내전을 위한 총기 준비, 부정투표 가담 이주민·선거관리인 사살 등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극단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했다. ‘프라우드 보이스’의 일부 회원들은 1·6 사태 때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4일 미국 워싱턴DC 프랭클린 공원 일대 한 상업용 건물에 약탈 등에 대비하기 위한 울타리가 설치돼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4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근처에 있는 한 샌드위치 가게가 코르크 합판에 둘러싸여 '요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4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근처에 있는 한 커피 가게가 코르크 합판에 둘러싸여 '요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워싱턴포스트(WP)는 “일부 사업체와 부동산 소유주들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개인 보안은 물론 거리와 맞닿아 있는 창문과 출입구를 강화하는 등 약탈·폭동 가능성에 대한 비상 계획을 수립했다”고 밝혔다. 백악관에서 북쪽으로 두 블럭을 가면 있는 편의점 체인 CVS는 평소에도 좀도둑이 들끓어 골머리를 앓는 곳이다. 이날 1층 전면에는 가로 50m에 이르는 대형 합판이 설치돼 ‘요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직원은 “걱정과 두려움이 크다”며 “누가 이기든 크게 상관없으니 별 탈 없이 선거가 빠르게, 민주적으로 마무리됐으면 한다”고 했다. 프랭클린 공원 일대의 가게들도 겉으로만 봐서는 영업 중인 건지 공사 중인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한 자영업자는 “덕분에 점심 매출이 평소보다 바닥을 쳤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큰 피해를 불러올 수 있다”며 “이번 주 장사는 다 한 거나 다름이 없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직원들에 재택 근무를 독려한 곳들도 많다고 한다.

백악관 바로 앞에 있는 한 상업용 건물 앞에서도 관리자들이 높이가 2m 정도 되는 철제 펜스를 지하 주차장 입구에 설치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 건물 관계자는 “건물 이용자들이 유사시 대피 절차를 숙달할 수 있도록 연습하라는 당국의 문자 메시지까지 받았다”며 “워싱턴은 그야말로 전운(戰雲)이 고조된 상태”라고 했다. 워싱턴DC 내 150여 개 상업용 건물에 경비원을 파견하는 ‘어드마이럴 시큐리티 서비스’ 측은 “백악관과 의회 주변의 고객 시설에서 12시간 교대 근무를 한 민간 인력 2000여 명이 준비된 상태”라고 했다. 경찰 역시 상당수 인원이 휴가도 포기한 채 3300명이 백악관·의회 의사당을 중심으로 거리 곳곳에 투입된 상태다. 백악관 앞 라파예트 광장은 철제 펜스가 사방에 설치돼 통행이 불가능했고, 그 안에서는 내년 1월 있을 대통령 취임식 퍼레이드를 위한 세트 시공 작업이 한창이었다.

4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앞 라파예트 광장으로 가는 길목에 검은색 철제 펜스가 설치돼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4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앞 유명 기념품 가게 근처에 철제 펜스가 설치돼 있는 모습.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4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북쪽에 있는 대형 편의점 체인 CVS 입구에 대형 코르크 합판이 설치돼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약 4년 전 트럼프에 선동된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지지자들의 습격을 받은 트라우마가 있는 캐피톨 힐(Capitol Hill·의회 의사당)은 특히 더 차분한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상·하원 건물이 차량의 진·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바로 앞에 있는 연방대법원도 철제 펜스가 설치됐다. 대법원 앞엔 1인 시위자들만 간간히 보였다. 경찰은 해리스가 개표 방송을 시청할 것으로 알려진 북서부 하워드대 일대도 이날 오후 7시부터 교통 통제에 들어갈 계획이다. 흑인 명문 하워드대는 해리스의 모교(母校)이기도 하다. 부통령 관저가 있는 해군 관측소 일대도 특급 경호가 이뤄지고 있다. ‘어드마이럴 시큐리티 서비스’의 레온 베레스포드 부사장은 언론에 “워싱턴 경찰과 상업용 건물주들은 거리 시위와 관련 폭력에 대처하는 데 있어 전국에서 가장 잘 훈련된 사람들 중 하나”라며 “전투 테스트를 거쳤고, 과거의 도전으로부터 배웠다”고 했다.

4일 미국 워싱턴DC의 의회 의사당 앞에 펜스가 설치돼 차량 진출입 통제가 이뤄지고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