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이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과 동시에 연방 의회 권력까지 장악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5일 대선과 함께 치러진 상·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민주당이 우위였던 상원에서 다수당 지위를 되찾아 왔고 하원에서도 다수당 지위를 굳힐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미 공화당이 대선과 상·하원 선거 모두를 싹쓸이하는 ‘레드 스위프(red sweep·공화당 상징색인 붉은색에 빗댄 표현)’가 확정된다면 트럼프는 내년 1월 시작하는 2기에 견제받지 않는 ‘독주 체제’를 구축하게 될 전망이다.
전체 100석 중 34석에 대한 선거를 치른 상원은 공화당이 최소 52석을 확보(한국 시각 7일 오후 8시 기준)해 다수당을 탈환했다. 당초 민주당은 51석(친민주당 성향 무소속 포함), 공화당이 49석이었는데 이를 뒤집었다. 2년마다 435석 전체를 대상으로 선거하는 하원도 공화당이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공화당은 7일 오후까지 206석, 민주당은 191석을 확보해 15석 차이가 난다. 하원에서 과반(218석 이상)을 차지하기 위해 공화당은 아직 승패가 갈리지 않은 의석 가운데 12석 이상만 가져가면 된다. 미 언론들은 하원의 공화당 승리를 선언하긴 이른 상황이라면서도 “공화당은 이미 상·하원 다수당 확보를 낙관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법부를 상징하는 미 연방대법원은 트럼프가 대통령 1기(2017~2021년) 때 보수 성향 대법관 세 명을 새로 임명하며 보수 여섯 명, 진보 세 명으로 보수 우위가 이미 성립돼 있다. 이번 선거에서 ‘레드 스위프’가 굳어진다면 트럼프 2기는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국경 통제 강화, 대규모 관세 부과, 전임 조 바이든 정부의 산업 지원 정책 조정 등을 야당의 견제 없이 밀어붙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미국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 때 대통령뿐 아니라 상·하원까지도 공화당에 힘을 실어줬다. 2020년 바이든이 대통령으로 선출됐을 때 민주당은 상원에서 세 석을 빼앗아 오며 50석을 확보했고 하원도 다수당을 유지했지만 4년 사이 상황이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미국 유권자들이 그동안 보수 성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2020년 선거는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 진압 과정에서 사망하며 촉발된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 시위가 미국을 휩쓸 때 실시됐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폭로하는 이른바 ‘미투(MeToo)’ 운동이 성과를 내면서 주(州)마다 관련 법이 통과되고 여성 인권 신장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후 흑인 등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반대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 캠페인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했다. 성소수자 인권 신장, 이주자 권익 보호 등도 PC 캠페인의 물결을 타고 힘을 받았다.
젊은 유색인종·성소수자가 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런 흐름을 반겼지만 미국 인구의 다수를 구성하는 백인과 기독교 신자 중엔 이를 불편하게 느끼는 이가 많았다. 대선 다음 날인 6일 미 포린폴리시는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후보는 트랜스젠더 운동선수의 여성부 대회 출전 허용, 경찰 예산 축소 캠페인(defund the police) 등 과도한 PC를 내세우는 바람에 너무 많은 표를 잃었다”고 분석했다. 그간 민주당은 주요 지지층의 결집을 위해 ‘워크(woke·깨어 있다는 뜻)’라고도 불리는 PC주의를 내세웠는데, 이런 기조가 중도층 유권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고 분석된다. 미국 전체 인구 중 백인은 여전히 60% 정도고, 기독교 신자 비율은 66%에 달한다.
바이든의 임기 4년 동안 미국은 ‘워크 전쟁’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PC주의를 두고 분열이 극심한 시기였다. 몇몇 학교와 공공 도서관에서 동성애·흑인 등을 차별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금서로 지정하자 ‘미국의 정신’인 표현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반발이 보수층을 중심으로 거세게 일었다.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이뤄지는 공립학교 내 성소수자 옹호 교육, 유색인종과 성소수자가 전면에 등장하는 문화 콘텐츠 등이 기독교계 백인들의 반발을 사는 일도 있었다. 공화당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이에 맞서 초등학생에게 성 정체성 교육을 금지하며 진보 진영에서는 반발을, 보수 진영에선 환호를 부르기도 했다.
트럼프가 재임 시절 보수 성향 대법관 셋을 임명하며 보수로 확실히 기운 연방대법원은 잇달아 백인·기독교 보수층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리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2022년 6월 연방 차원의 낙태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고, 소수 인종 우대 입학 정책에 대해 도입 60년 만인 지난해 6월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이 대표적이다. (미 연방대법원은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같은 역할도 겸한다.)
트럼프는 이런 흐름에 올라타 조국·가족·신앙·소명 같은 보수 본연의 가치를 반복해서 강조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대선은 동맹국들에 미국이 나라 밖의 전쟁, 과도한 이민자, ‘깨어 있음’을 강조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지친 나라라는 트럼프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했다”고 했다. 공화당과 트럼프는 PC에 지친 유권자들의 반감을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특히 지난 7월 있었던 총격 사건에서 생존한 후엔 ‘신이 선택한 후보’라는 구도를 만들어 ‘기독교 성자’의 이미지를 연출했다고 NYT는 전했다. 사건 직후 소셜미디어에 악마와 싸우는 대천사 성(聖) 미카엘의 그림을 올리고, 공화당 전당대회 때 총격 사건 당시 목숨을 잃은 소방관의 헬멧에 기도하듯 입 맞춘 것이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반면 4년 전 승리를 안겨준, PC주의에 대한 집착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대선 패배 후 민주당 내 일고 있는 자성론을 소개하며 “중도층을 불편하게 하는 문화적 의제들에 덜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했다. 경합주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유권자 집단인 저소득·저학력 백인 노동자 표심에 소구할 수 있는 의제가 아니었음에도 민주당이 지지층을 의식해 진보 의제를 과도하게 밀어붙였다는 취지다. 해리스는 선거 막판 백인 여성 유권자를 캐스팅 보터로 보고 ‘자유’를 외치며 선거 막판까지 생식권(출산과 관련해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이슈에 캠페인을 집중했다. 공화당 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던 백인 여성 중 ‘히든(숨겨진) 해리스’ 표를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이었지만 이마저도 역효과를 낳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선거 당일 AP 출구 조사에 따르면, 전체 유권자의 약 절반이 “정부와 사회의 성소수자에 대한 지지가 지나치다”고 했다. 경합주 네바다의 경우 ‘낙태권 보장’ 여부를 묻는 주민 투표는 가결됐지만, 대선 투표에선 트럼프가 해리스를 이긴 것으로 관측됐다. 선거 당일인 5일 진행된 CNN 출구 조사에 따르면, ‘낙태가 대부분의 경우 합법이야 한다’는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트럼프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레드 스위프
미국 공화당이 백악관과 상·하원 의회를 모두 장악하는 현상. 공화당 상징색인 ‘붉은색(red)’과 ‘싹쓸이’라는 뜻의 ‘스위프(sweep)’를 합친 표현이다.
☞PC와 워크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은 다양성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추구해 일상에서 성소수자 등 소수 계층이나 약자에 대한 편견을 타파하고 배려하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워크(woke·깨어 있다는 뜻)는 PC 가치관을 중시하는 생활 양식을 뜻하지만, 지나치게 PC에 몰입하는 것에 대한 조롱과 비난의 의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