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정부와 싱크탱크 등 워싱턴 조야(朝野)에선 현대차가 제작한 A4 용지 두 장 짜리 브로슈어가 화제다. 여기에는 지난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현대차가 미국의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얼마나 기여했고, 첨단 기술 분야에서 얼마나 많은 미국 회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지가 시각화 자료로 상술돼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이후 세계 각국의 정부·기업들이 워싱턴에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미국 시장에서 질주하고 있는 현대차가 선제 대응에 나선 것이다.
현대차가 제작한 이 자료의 이름은 ‘미국인과 미국의 번영을 위한 현대차그룹(HMG for American People & Prosperity)’이다. 현재 미국의 정부 기관과 상·하원의원실, 주요 싱크탱크 등에 두루 전달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 싱크탱크의 중견급 연구원은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두고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외국 기업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아웃리치를 한 경우는 아직 없어 빠르게 입소문을 타고 있다”고 했다. 본지가 입수한 자료를 보면 “현대차그룹(HMG)은 지난 40년 가까이 미국 공동체의 필수적인 일원으로 50개주의 미국인들을 지지해왔다” “임팩트있는 투자로 미국과 미국인들의 성장을 위한 우리의 오랜 헌신을 지속할 것”이라 돼 있다. 현대차는 미국 내에서 57만개가 넘는 일자리를 창출했는데 이는 메릴랜드주(州) 볼티모어 인구(2023년 기준 약 56만5000명)보다 많은 것이다.
또 모빌리티·부품·건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진 투자 금액만 205억 달러(약 28조8120억원)가 넘고 미국 내 64개가 넘는 사업장이 있다. 올해 미국에서 생산된 현대차는 70만대가 넘고, 50개주에서 딜러십이 1862곳(현대 845개, 기아 788개, 제네시스 229개)에 이른다. 현대차는 자율 주행·수소·소형모듈원자로(SMR)·로보틱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민관과 협업하고 있는데 올해만 해도 웨이모(구글의 자율 주행 분야 자회사), 제너럴모터스(GM), 우버, 아마존 등 미국의 첨단 기술을 리딩하고 있는 기업들과 잇따라 파트너십을 맺었다.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지난해 최대 규모인 215억 달러(약 30조2000억원) 투자를 약정한 한국 기업들 사이에서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주미 대사관 관계자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 내 고용에 얼마나 잘 기여하고 있는지 이야기 할 계획인데 (현대차 자료를) 적절히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트럼프와 측근 인사들 대부분이 단문(短文)의 시각화된 자료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외교부도 올해 트럼프 측근 인사들과 서울·워싱턴에서 만날 때마다 통계와 시각화 자료 등을 동원해가며 “한국이 동맹의 일방적인 수혜자가 아니고, 군사·경제·통상·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핵심 파트너로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정부 고위 관계자)고 한다. 지난 11일 외교부의 영문 X(옛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자료를 보면 각종 그래픽 요소를 동원해 한 페이지에 한국이 방위비 등을 공정하게 부담하고 있고, 우리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대미(對美) 투자를 하고 있는지를 상술했다. 이밖에 주미 대사관은 최근 트럼프가 만든 소셜미디어인 ‘트루스 소셜’ 계정을 개설해 주요 인선이 있을 때마다 환영 메시지를 내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 2월 해외 대관 업무 조직인 ‘글로벌 폴리시 오피스(GPO)’를 사업부급으로 확대 개편했다. 윤석열 정부 초대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을 지낸 김일범 부사장을 필두로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을 지낸 미국통 우정엽 전무, 청와대 외신대변인 출신 김동조 상무 등 외교부 못지않은 라인업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경제 안보 전문가인 연원호 전 국립외교원 경제기술안보연구센터장을 글로벌경제안보실장으로 영입했다. 이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국내 완성차 수출과 글로벌 판매에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 선제적인 대응을 하자는 정의선 회장의 포석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