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내년 1월 20일 취임 전 자신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를 대부분 벗어나게 됐다. 헌법상 행정 수반 및 군(軍) 통수권자인 현직 대통령 기소는 대통령의 책임·권한에 대한 과도한 간섭으로 간주하는 미 법무부 내부 원칙에 따라 잭 스미스 연방 특별검사가 25일 트럼프에 대한 기소를 취소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법무부는 이 요청을 즉각 받아들였다.
2020년 대선 결과 뒤집기 시도와 백악관 기밀 문서를 불법 유출한 혐의로 연방 특별검사에게 기소당한 트럼프는 그동안 이 절차 자체가 자신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라고 주장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특검을 해고하겠다고 밝혀왔다. 트럼프가 재선될 경우 기소가 유지될지 정치적·법리적 논란이 일었는데, 결국 트럼프는 ‘대통령 당선’이라는 정치적 승리로 사법적 면책까지 거머쥐게 됐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는 재판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대통령 재선이라는 사실을 인지해 왔다. 결국 (법적 절차를 대통령 당선으로 무력화하려는) 전략이 먹혔다”고 전했다.
지난해 4월 이후 트럼프가 기소된 사건은 총 넷이었다. 이번에 기소가 취하된 연방 특검 사건 둘 외에도 뉴욕 지방검찰엔 ‘성추문 입막음 의혹’ 사건으로, 조지아주 검찰엔 선거 결과 뒤집기 시도로 기소됐다. 뉴욕 지검은 이미 배심원단이 유죄 평결을 내린 성추문 사건에 대해 트럼프가 대통령 임기를 마칠 때까지 재판을 중단해 달라고 지난 19일 요청했다. 조지아주는 검찰 내부의 추문 사건으로 재판 진행이 되지 않고 있다.
스미스 특검은 기소를 취소하는 요청서에 “현직 대통령은 기소하지 않는다는 법무부의 오랜 입장에 따라 (네 가지) 혐의를 취소하려고 한다. (취소 결정이) 범죄의 중대성이나 정부(특검)가 수집한 증거 및 기소 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트럼프가 받는 혐의가 중대하고 증거도 많지만 현직 대통령은 기소하지 않는다는 법무부와 연방 검찰의 전례에 따라 기소를 취소한다는 취지다.
스미스 특검은 “피고인(트럼프)을 상대로 한 본안 기소에 대한 정부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트럼프에 대한 기소를 취소하기로 한 것은 ‘현직 대통령은 형사 기소 대상이 아니다’라는 미 법무부의 과거 내부 판단을 존중한 결과라고 했다. 미 국민의 투표로 선출한 대통령을 기소해 대통령 권한을 제한하는 건 행정부 소속 검찰의 과도한 기소권 행사라고 판단한 것이다.
트럼프를 제외하고 미국은 건국 이래 전·현직 대통령을 기소한 적이 없다. 스미스 특검이 법원에 제출한 기소 취소 요청서에선 자신들이 기소한 전직 대통령이 재선되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 처한 특검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요청서에 “‘법 위에 있을 정도로 높은 사람은 없다’는 오랜 믿음과 ‘대통령이 막중한 직무를 수행하는 데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헌법상 법리 등 미국의 중요한 두 원칙이 상충하는 상황”이라며 “법무부 법률 고문실(OLC)에 자문해 기소 취소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직 대통령에 대한 기소 유지가 대통령의 헌법적 역할 수행 능력을 해칠 수 있고 공무 수행을 심각하게 방해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트럼프에 대한 기소를 취소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스미스 특검은 OLC가 1973년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불법 도청을 사주한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 기소에 대해 헌법을 해석해 낸 의견서를 인용했다. 닉슨은 결국 1974년 스스로 물러났지만 사퇴 전까지 그를 형사처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셌다. 이에 OLC는 당시 “현직 대통령은 형사 기소 대상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런 원칙은 이후 법무부의 관례로 굳어져 2000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백악관 인턴 성추문 사건에 이어 이번에도 인용됐다. 한국과 달리 미 헌법엔 대통령의 면책 특권이 적시돼 있지는 않다.
특검은 과거 사례와 법무부의 전통을 기소 취소 이유로 들었지만, 대통령이란 이유로 그 어떤 범죄의 책임을 벗어날 특권이 부여받는 데 대한 논란은 다시 대두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뉴욕 지검이 배심원 유죄 평결까지 나온 성인물 배우 성추문 입막음 사건에 대한 판결을 (트럼프 임기가 끝나는) 4년 뒤로 연기해 달라고 요청한 데 이어 연방 검찰까지 꼬리를 내리자 대통령이라는 정치권력 앞에서 무력해진 사법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일 수 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사건의 기소 종결로 ‘대통령의 범죄’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며 “전·현직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 미국의 사법 시스템이 법적 책임을 물을 능력이 있을지를 시험해 온 긴 ‘법정 드라마’를 특검은 이제 (기소 취소로) 끝내려 하고 있다”고 했다.
앞서 지난 7월 미 대법원이 “대통령이 임기 중 대통령으로서 행한 공식 행위에 대해서는 절대적 면책특권이 있다”고 내린 판결도 트럼프의 사법적 부담을 덜어낼 명분을 열어줬다는 해석이 나온다. 특검이 이번 요청서에 “기소장에 최종 적시한 행위는 대법원이 면책 대상으로 지목한 (공무와 관련한) 행위는 아니다”라고 적기는 했지만, 대법원의 결정으로 검찰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특검이 기소한 두 사건은 모두 트럼프가 2020년 대선에서 낙선한 후 차기 대통령(조 바이든)이 취임하기 전, 즉 공식적으로는 대통령 임기 중에 한 행동이어서 면책특권이 있다는 것이 트럼프 측 주장이다. 대법원은 판결에 ‘공무와 관련한 행위’에 대해서만 면책받는다고 선을 그었지만 ‘공무’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아 적용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지적이 일었다. 미 대법원은 대법관 아홉 명 중 트럼프가 ‘1기’ 때 임명한 셋을 포함해 여섯 명이 보수 성향이다.
대통령 권력과 함께 사법 리스크 해소까지 얻은 트럼프는 이날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 글에 “(스미스 특검이 제기한) 소송은 내가 겪어야 했던 다른 모든 소송과 마찬가지로 공허하고 불법적이며 결코 제기돼서는 안 됐던 소송”이라며 “민주당이 정치적 반대자인 나를 상대로 벌이는 싸움에 1억달러(약 1400억원)가 넘는 세금이 낭비됐다”고 했다. 트럼프 2기 백악관 공보국장으로 지명된 스티븐 청도 성명을 내고 “법치주의의 중대한 승리”라고 했다. 그는 “미국 국민과 트럼프 대통령은 사법 제도의 정치적 무기화가 즉각적으로 종식되기를 원하며, 미국이 통합되기를 고대한다”고 했다.